교토 가모가와 강변, 유학생 두 남녀는 그저 외로움만 나눴을까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샌님인줄 알았다. 인터넷을 통해 지용의 프로필을 뒤적여 보니 이렇다 할 스캔들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10년 차이는 있어도 동시대인이라 해도 무방할 시인 백석은 자야라는 기생 출신 연인과의 연애담이 질펀했지만 지용은 티 없이 맑았다.
두 시인의 대표작은 지용의 '향수'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꼽히고 있다. 향수에 나타난 아내의 소묘는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였다.
흰 당나귀에 나오는 연인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앉어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라고 그려져 있다.
지용의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백석의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나리고, 눈은 푹푹 나리는 밤의 아름다운 나타샤'라는 두 사람의 이미지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그것은 애처가의 '아내에 대한 자상함'과 연애박사의 '연인과 도망가서 산골에서 살림 차리기'로 갈라선다. 그래서 지용은 '샌님', 백석은 '바람쟁이'란 등식이 독자들의 머릿속에 굳어져 있다.
정말 그럴까. 지용은 정말 황칠 한 번 한적 없는 백지처럼 '인생을 그렇게 깨끗하게 살았을까'하는 의구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무지렁이 백면서생이라도 '허리 아래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데 아름다운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이 노 젓지 않고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정지용 문학상을 탄 적이 있는 지인이 '향수와 나타샤'란 내 글을 읽고 일본 유학 시절 지용의 행적과 그 시절에 썼던 시 한 편과 수필 두 편을 소개해 주었다. 시의 제목은 '압천'(鴨川)이었고 수필은 '압천상류 상 하'였다. 거기에다 지인 자신이 쓴 '가모가와(鴨川)에서 만난 정지용 시인'이란 글을 동봉해 보내 주었다.
지인이 보내준 문건은 일본 교토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지용이 유학시절 자주 산책했던 가모가와 강변과 그 주변에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시인의 흔적을 추적한 알찬 기록이었다. 그는 출발할 때 학술행사보다는 '지용의 발자취 더듬기'에 더 주력하기 위해 접이식 산악자전거를 갖고 가서 강변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고 한다.
지용이 1923년 도지샤대 영문과에 입학했을 때 한 살 많은 동급생인 김말봉(1901~1944'밀양 출신 소설가)과 어울려 다니며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 나눴다고 한다. 지용은 가모가와 강의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하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용의 글을 보면 '우리 둘은 거닐다가 자리를 잡으면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학기시험에 몰려 노트를 들고 나와 누워서 보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또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에 사람은 둘이니 한 우산 안으로 꼭 다가서 걷는 수밖에 없었다'는 걸 보면 이미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강가에 앉은 두 남녀의 부질없는 돌팔매질은 사랑의 신호이며 노트를 누워서 볼 때 베개는 연인의 허벅지가 제격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느 하루는 천변을 걷다보니 너무 멀리 걸어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비예산 케이블카 건설 현장에 이른다. 두 사람의 선남선녀가 동포라는 사실을 알자 노동자 숙소에 억지 초대를 받아 식사를 대접받는다. 그때 "둘은 어떤 사이냐"는 물음에 엉겁결에 "사촌 간"이란 옹색한 변명을 했다고 한다. 지용이 쓴 산문의 행간에는 이미 두 사람은 플라토닉을 넘어선 상태임을 은연중에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이뤄지지 못한다. 지용에겐 12세 때 결혼한 동갑내기 송재숙이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로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둘은 1929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다. 돌아와서 소식이 없자 지용을 못 잊어하던 말봉이 옥천을 찾아온다. 지용 대신에 아내가 사립께로 나가 "누구신데 어쩐 일로 왔시유"하고 퉁명스럽게 묻는 것으로 말봉의 사랑은 끝난다.
이 라스트 신은 영화 '초원의 빛'에서 아내가 지켜보는 옛 애인 위렌 비티를 찾아온 나탈리 우드의 머쓱한 표정 그대로 일 것 같다. 함부로 쏜 화살을 맞은 상한 가슴은 떠나버린 그 사람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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