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에 치인 고단한 역사…종교는 가슴 시린 상처조차 아물게 했다
여행은 새해 첫날부터 딱 일주일 동안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4시간. 아르메니아는 '수도원의 나라'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수도원이 많은 나라인지라 비록 무신론자이긴 하나 여행 목표를 '수도원 기행'으로 잡았다. 하지만 일주일간 아르메니아가 보여준 것은 종교 이상의 무엇이었다.
세계에서 아르메니아만큼 고단한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유럽과 인도를 연결하는 교역로로 번창했지만, 그 덕분에 힘 있는 나라 중 이 나라를 건드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으니 말이다. 15세기 이후에는 오스만과 페르시아 제국이 각축을 벌였고, 1827년엔 러시아 제국의 차지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오스만투르크가 자행한 대학살의 희생양이 되는 고초를 겪는다. 19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립한 아르메니아는 인근 국가와의 영토분쟁으로 여전히 골치가 아프지만, 그 와중에도 차분히 현대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수도원
아르메니아는 4세기에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생활 중심에 종교가 있으니 곳곳에 자리한 수도원이 곧 삶의 터전이자 중요한 예술공간이 됐다. 오랜 기간 강대국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1천700년 넘게 고유한 종교와 문자를 지켜냈다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이 나라는 세 곳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에치미아진의 대성당과 즈바노츠 사적지, 예레반 근교의 게하르트 수도원과 아차트 계곡, 그리고 아르메니아 종교 건축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아흐파트와 사나힌 수도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록대로 찾아 나서는 길과 수도원 탐험이 자연스레 아르메니아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예레반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은 에치미아진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대성당으로 유명하다. 이 성당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그레고리가 꿈속에서 본 빛줄기가 떨어지던 곳에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뒤편에 보물실이 있는데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이 이곳에 보관돼 있어 더 명성을 얻었다. 예레반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즈바노츠 성당은 건축가였던 대주교 네르세스 2세가 세웠다.
예레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르니'라는 마을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인 1세기경 태양신을 모시던 가르니 사원이 있다. 헬레니즘 양식의 사원 옆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주상절리 지대의 아차트 계곡은 '돌의 교향곡'(Symphony of Stones)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기막힌 풍광을 펼쳐놓는다. 발걸음을 돌려 9㎞ 정도 가면 신선이 산다 해도 믿을 만큼 수려한 골짜기 깊숙이 게하르트 수도원이 나타난다. 이곳 일부는 거대한 바위를 파내고 안을 세심하게 조각해 만들어졌다. 사람의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돌덩이를 쌓고 깎은 것으로 모자라 암벽을 파내기까지 신심이 이끌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아르메니아의 수도원은 묵직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어두운 내부를 비추는 것은 신과 만나기 위해 뚫어놓은 천장 구멍과 창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촛불뿐. 화려하게 장식된 유럽 대도시 성당과는 다른 단정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경치와 사람 때문에 더 즐거운 나라
여행 중반쯤 데베드 협곡이 있는 북쪽으로 향한다. 이 협곡이 있는 조지아 접경의 로리 지역은 고원지대에 있어 주변 마을인 사나힌, 아크너, 알라베르디가 한눈에 들어온다. 로리 지역의 풍부한 문화유산 중 991년에 완성된 아흐파트 수도원은 건축적인 화려함과 협곡으로 향하는 탁 트인 전망 때문에 여행자들이 열광하는 곳이다. 협곡 사이 골짜기와 언덕을 넘고 또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중세 아르메니아 건축의 진수로 꼽히며 아르메니아의 고유한 묘석인 카츠카르(십자가 석)도 발견할 수 있다. 이끼로 뒤덮인 지붕이 인상적인 사나힌 수도원. 구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케이블카를 타고 고지대의 수도원에 도달하는 과정도 색다른 재미다.
남쪽으로 내려가 아제르바이잔 인근의 보로탄 협곡을 찾아 여러 굽이 돌다 보면 협곡의 가장자리 암벽 위에 세워진 타테브 수도원이 나타난다. 로리 지역의 세계문화유산과 마찬가지로 이곳 경치 역시 입이 떡 벌어진다. 왔던 대로 급경사의 언덕을 거슬러 가면 고리스로 빠지는 길이 근처에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늘어선 기이한 동굴 마을과 주상절리를 포함해 이 마을에는 볼 것이 많다. 보통은 고리스를 기점으로 1박 이상을 하며 타테브 수도원에 다녀오거나 보로탄 협곡, 동굴을 탐험한다. 길에서 만나는 전통적인 양치기와 주민 수보다 많은 양 떼는 보너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대놓고' 친절하다. 눈이 마주치면 예외 없이 환한 미소로 말을 걸어온다. 고단한 역사가 준 상처는 도대체 어디쯤 숨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없이 따뜻한 사람들. 고대 수도원, 철옹성 같은 요새는 분명 아르메니아 여행의 백미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다. 공통의 언어 없이도 이 상냥하고 겸손하고 편안한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고 좋은 기운을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만남은 특히 유기농 채소와 석쇠에 구운 고기, 집에서 만든 수준급의 브랜디로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아르메니아는 분명 사람 때문에 더 즐거움을 주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숙소 주인 아주머니가 내온 오디와 산수유 열매로 만든 주스는 밥 대신 이걸로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다.
여행 적기는 숲이 울창하고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 봄과 가을이다. 하지만 눈부신 설원과 시린 하늘 때문에 한겨울의 여행도 매력적이다. 역사와 문화가 풍부한 데베드 협곡, 암석을 파내 지은 게하르트 수도원, 스스럼없이 음식을 나누는 정서, 그리고 낮은 물가까지. 아르메니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여행하기 좋은 나라였다.
글'사진 정영희 전 '대구문화' 통신원
**'세계 일주' 새 연재 시작합니다
매일신문이 2014년 독자들을 지면으로나마 세계 일주를 보내드립니다. 오늘부터 2주에 한 번씩 전 '대구문화' 해외통신원 정영희 씨의 세계 여행기 '정영희와 함께 떠나는 세계일주'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정영희 씨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일터였다. 2010년 말 남편을 따라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문화 수도로 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기고, 2년간 월간 대구문화의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했다.
지금껏 발 도장을 찍은 곳은 32개국 200여 개 도시. 사람, 음식, 문화를 두루 갖춘 여행지를 선호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낯설기만 하면 어디라도 순식간에 마음을 뺏기는 이른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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