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거인(巨人)에게 길을 묻다] 제1부 박정희 대통령 1)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 지도자

입력 2014-01-06 07:36:36

"빈곤탈출 최우선…정치는 국민의 눈물 닦아 주는 것"

박정희 대통령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했다. 당시 제자들은 박 대통령을 민족혼을 심어준 교사, 다정다감한 교사로 기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하숙을 했던 문경 청운각.
박정희 대통령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했다. 당시 제자들은 박 대통령을 민족혼을 심어준 교사, 다정다감한 교사로 기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하숙을 했던 문경 청운각.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올해로 35년이 됐다. 한 세대가 훌쩍 지난 것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또한 당파적 태도와 사심(私心)을 버리고 차분하고 불편부당한 마음으로 이 거인을 마주하고, 탐구할 때가 됐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며 무조건 추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편협된 시각을 갖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 현대사에 누구보다 큰 빛과 그늘을 드리운 박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좁게는 대한민국 대통령 리더십, 넓게는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찾는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 국민 평가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꿈과 비전,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나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박 대통령의 여러 리더십 가운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한 지도자'란 점이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은 박 대통령을 두고 카리스마와 서민적 이미지를 함께 갖춘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국민을 사랑했던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했다.

◆"정치는 국민 눈물을 닦아주는 것"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초 경남 마산 한일합섬 공장을 방문했다. 나이 어린 여성 근로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이 여성 근로자는 "공장장이 가끔 영어 단어를 쓰며 말씀하시는데 알아듣지 못할 때 부끄럽고 속이 상한다. 일에도 지장이 많다"고 울먹였다. 분위기가 숙연해진 가운데 대통령이 수행하던 사장에게 "이들을 위해 야간학교라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학력 인정을 받는 산업체학교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수많은 어린 소녀 근로자들이 배움의 한(恨)을 풀게 됐다. 박 대통령은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국가와 혁명과 나'란 책에서 박 대통령은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했다. 가난에 시달리는 국민에 대한 애정, 나아가 가난에서 국민을 벗어나게 하려는 그의 강철 같은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은인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이것이 본인 소망의 전부다." 빈곤 탈출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한 박 대통령의 생각의 기저(基底)엔 '백성이 근본'이란 사고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朴正熙'전 13권)를 쓴 조갑제 씨는 "박 대통령이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것은 못살고 힘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결과일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을 두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눈물이 있는 지도자'란 평가도 있다. 1964년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독일(당시 서독)을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현지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광부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異國)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박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참석자들 모두가 울어 눈물바다를 이뤘다.

◆"의협심과 인정이 강한 사람"

1961년 5'16 직후 검은 선글라스에 군복을 입은 모습이 워낙 강렬한데다 일부에서 덧씌운 독재자란 부정적 이미지 탓에 박정희 대통령 하면 냉혹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1961년 6월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항간에서 박 장군을 아주 냉혹한 군인으로 알고 있는데…"란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허, 그건 너무한데요. 사귀어 보이소.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구인 구상(具常) 시인은 생전에 "그 친구는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시심(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9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북한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사단장에게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박정희 참모장은 정색을 하고 사단장에게 얘기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아마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플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숲과 나무에 대한 사랑을 산림녹화에 성공한 비결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의 일기엔 낙엽, 꽃, 나무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많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사랑한 것은 이 땅에 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民草)였다. 박 대통령을 두고 "자신의 한(恨)을 민족의 한으로 여기고 한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나라를 발전시킨 사람"이란 평가가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박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됐고, 경제발전에 매진하게 됐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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