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전통적으로 평양, 진주, 개성 등과 더불어 기생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일제 식민지 시기 동안 대구에서 기생은 샘 밖 골목, 현재 아미고 호텔 주차장에서 만경관과 병무청 뒤편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모여 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중 누구도 그곳에 대구의 유명한 권번조합이 있었고, 기생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겨우 육칠십 년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김동인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동인이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의 대부분을 서른이 되기 전에 날려버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날려버린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생과의 유흥에 탕진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역시 드물다.
김동인은 단지 기생과의 '오입'만을 즐겼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생이 만들어 내는 전통적 조선의 풍류, 즉 전통적 조선의 문화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양반들과 유흥을 즐기는 기생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김동인이 기생을 주제로 발표한 대표적 소설이 '눈을 겨우 뜰 때'(1923)이다.
소설의 여주인공 금패는 어릴 적부터 기생의 삶을 동경하여 기생이 된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조선전통 예능인으로서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은 변하였고, 기생은 예술을 하는 '예능인'이 아니라 춘정을 파는 더러운 '창기'이며, 일부일처제와 남녀평등의 주된 방해자이며, 청산되어야 할 전 시대의 악습으로서 취급된다. 이 극단적 변화 앞에서 금패는 결국 자살에 이른다. 그런 금패의 몰락을 좇아가는 김동인의 시선은 슬프다. 김동인은 금패를 통해 자신이 그처럼 사랑했던 전통적 풍류의 세계, 전통적 조선의 몰락을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조선에서는 금패와 같은 일명 '예기'들의 자살이 속출하고 있었다. 1923년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명기 강명화의 자살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명문가 아들과의 비극적 사랑에 좌절하여 자살을 선택한 기생 강명화의 죽음에 대해서 당대 사회가 보낸 관심은 다소 과다했다. 김동인은 강명화에 대한 소설을 썼고, 동아일보는 여러 날 집중 분석 기사를 게재했고, 신여성 나혜석은 강명화 관련 논설을 썼다. 이 호들갑스러운 관심이 단지 기생과 양반 자제 간의 비극적 사랑에 대한 공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명화의 자살은 갑작스레 밀려드는 새로운 제도와 문화 앞에서 대책 없이 몰락해가는 전통적 조선의 모습과 중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 앞에서 몰락해가는 1920년대 기생들의 애잔한 삶을 목도했고, 기생의 몰락을 통해 전통적 조선 문화의 현실을 읽고 있었다.
대구 샘밖 골목에서 권번을 이루며 모여 살던 대구 기생들 역시 식민지 시기, 조선의 전통적 문화와 예술이 쇠락해 가면서 급속히 사라진다. 조선전통 예술인에서 몸을 파는'창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들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구를 포함한 조선의 많은 도시의 기생들은 사라져갔고, 조선의 문화와 예술도 쇠락해갔다. 정월 대보름, 삼월 삼질, 사월초파일, 오월단오와 같은 전통명절이 우리 삶 속에서 잊혀간 것처럼 말이다.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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