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기 죽은 후에 악기 줄 처음 끊겨
시와 음악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음주가무라고도 했다. 음악이 있으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제격이고, 듣는 사람이 호응하는 추임새는 소리꾼이나 연주자에겐 더없이 좋은 격려가 된다. 그런 호응자였던 '종자기'란 사람이 죽은 후에 거문고를 즐겨 탔던 '백아'는 분명 더 이상 연주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옛 이야기를 담고 읊었던 은은한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태고부터 냉랭하고 재주는 기발해도
백아의 물노래를 아는 사람 어찌 적나
악기 줄 끊어버린 종자기 애석함 알만하네.
太古冷冷韻技奇 伯牙流水少人知
태고냉랭운기기 백아유수소인지
子期死後絃初絶 棄置虛堂良可悲
자기사후현초절 기치허당량가비
【한자와 어구】
太古: 태고/ 冷冷: 냉랭하다/ 韻技奇: 운치와 재주가 기발하다/ 伯牙: 백아, 거문고를 잘 탄 사람의 이름/ 流水: 흘러내린 물소리/ 少人知: 아는 사람 적다/ 子期: 종자기, 음악을 잘 듣는 사람의 이름/ 死後: 죽은 후에/ 絃初絶: 악기줄을 처음 끊다/ 棄置: 버려두다/ 虛堂: 빈 집/ 良可悲: 참으로 슬퍼할 만하다.
'종자기가 죽은 후에 악기 줄 처음 끊겨'로 번역되는 칠언절구다. 작자는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1330~?)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이자 절신이다.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당시 사적을 바로 적은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태고부터 냉랭하고 운치와 재주 기발하여도/ 백아의 흘러내리는 물노래 아는 사람 적구나/ 종자기가 죽은 후에 악기 줄 처음 끊어져/ 빈 집에 버려두었으니 정말로 슬퍼할 만하구나'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오래된 거문고'로 번역된다. 자기를 알아주는 참다운 벗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결국 거문고 줄마저 끊어버렸다 해서 전해지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가 모티브다. 춘추전국시대에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매우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종자기가 죽어 거문고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사람이 없게 돼 백아는 그만 절망한 나머지 줄을 끊어 버리고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위 시는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에 착안했다. 백아가 끊어 놓은 쓸모없는 옛 가야금을 고려 말,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빗대어 음영하면서 화자가 원주 치악산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던 우국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비유한다. 망해가는 고려와 고금(古琴)이란 악기를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
원천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이다.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혼란한 정계를 개탄하여 치악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지으며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며 지냈다.
조선의 태종이 된 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어 태종이 즉위한 뒤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고 그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이 직접 그를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에게 선물을 주고 그의 아들 형을 현감에 임명하였는데, 이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고 부른다.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실려 있는 회고시 등을 통해서 그가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년에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를 두려워한 후손이 불살랐다고 한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다. 강원도 원주의 칠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장희구 (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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