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국가의 외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일 관계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양국이 마주 보는 대면(對面)의 한일 관계이다. 정상회담조차 열지 못하는 가운데 상호 불신이 깊어지는 지금의 한일 관계는 대면 관계의 악화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공동의 제3자를 상대로 양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계이다. 한미일 관계, 한중일 관계, 남북한과 일본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셋째,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의 한일 관계이다. 6자 회담, ASEAN+3, 동아시아 정상회의 등이 여기에 해당되나 중단되어 있거나 침체를 맞고 있어 아쉽다.
냉전 시대의 한일 관계는 북한과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다. 미국을 축으로 한 동맹 체제에서 한국과 일본은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며 대면 관계도 양호했고, 두 나라가 어깨를 나란히 해 왔다. 때로는 마찰과 대립도 있었으나, 북한 봉쇄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가 유지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역 협력을 위한 조건은 아직 조성되지 않았고 양국 사회의 교류도 한정되어 있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냉전 종식 이후 대일 종속의 경계심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역사 인식 문제가 크게 대두되면서 한일 양국의 냉전적 협조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면의 한일 관계가 큰 변화를 맞은 것이다. 또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일본이 대화와 교류 정책을 펴면 한국이 견제를 하고, 한국이 화해 협력 정책으로 전환하면 일본이 반대하는 등 마찰을 빚기도 했다. 공동의 제3자를 상대로 하는 관계도 크게 변화한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 협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6자 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 협의체로서 시작되었고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시아 다자 안보를 목표로 삼았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ASEAN+3와 동아시아 정상회담이 정례화되었다. 이들 다자 지역 협력 체제는 한일 양국 사이의 불신과 마찰을 회피'완화시킬 수 있는 기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6자 회담은 5년 전에 중단돼 재개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협력은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협상이 거론되면서 퇴색된 감이 있다.
그리고 미국을 둘러싼 한일 관계는 협조 관계가 아니라 줄다리기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과장한다. 그래서 미국의 지원을 간청하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 해석 변경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한국은 대북 전략에서 한미 협조를 강화하면서 역사 인식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환영한다고 하자, 한국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런 가운데 지난 17일 일본 아베 정권이 국가안전보장전략을 발표했다. 아베 정부는 중국과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미일 안보를 강화해 군비를 증강할 것을 분명히 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1990년대 중반과 비교하면 대립 국가와의 대화 및 교류를 통해 안정을 도모하려는 발상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전수(專守) 방위와 비군사적 공헌을 내팽개치고 군사력으로 국제 관계에 개입하려는 자세가 두드러진다.
전후 일본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 및 아시아 냉전에 힘입어 미국의 비호를 받게 되고, 침략과 식민 지배의 청산 노력을 회피해왔다. 냉전과 미일 동맹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탈식민지화도 봉쇄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전후 일본이 국제사회에 복귀해 아시아 각국과 관계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평화헌법과 경제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 평화헌법을 우회하여 군사력으로 국제 관계에 관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미국의 점진적인 쇠퇴와 중국의 상대적인 부상,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 설정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가 다시 냉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대만해협의 안정과 협력, 한반도의 비핵화와 화해 협력,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탈식민지화가 필요하다. 군사적 위협을 과장하여 대립을 부채질하거나 군사 개입 태세를 갖추기보다는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일 관계를 재구축할 외교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영호/히로시마시립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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