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리 낸 커피 한잔, 어려운 이웃 드세요

입력 2013-12-28 08:00:00

'미리내 가게' 운동…대구서도 새싹

전희찬(왼쪽) 인쇄피아 대표와 전충훈 대구사회연구소 전략사업국장
전희찬(왼쪽) 인쇄피아 대표와 전충훈 대구사회연구소 전략사업국장

"미리내 가게를 아시나요."

한때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맡겨 둔 커피) 운동이 SNS를 통해 많은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실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커피 값을 미리 내 주는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영국, 미국, 러시아, 캐나다, 호주 등으로 확산됐다.

이런 나눔 운동을 한국화한 것이 바로 '미리내 운동'이다. 이름도 친근한 우리말로 바꿨고, 나눔의 품목 역시 한국화했다. 커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족발'짬뽕 등의 식당을 비롯해 빵집, 목욕탕, 미용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미리 맡겨두고 나눌 수 있도록 한 것. '미리내'라는 명칭은 '미리 낸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착안한 말이지만, '은하수'를 일컫는 제주 방언으로 나눔의 마음이 반짝반짝 빛나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미리내 가게

미리내 가게는 기부를 원하는 사람과 필요한 사람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미용실을 이용한 어떤 사람이 몇천원의 거스름돈을 미리 적립해 두면, 모인 그 기부금을 머리 손질이 꼭 필요하지만 그럴 만한 비용이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신개념의 나눔 운동을 시작한 것은 김준호 동서울대 전기정보제어공학과 교수. 하지만 이 미리내 운동에서 대구는 빠져서는 안 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김 교수의 아이디어와 열정에 실질적인 추진 동력을 제공한 이들이 바로 대구지역 사람들인 것.

대구 중구 남산동 자동차골목에 위치한 인쇄피아 전희찬(35) 대표는 미리내 가게의 현판과 현황판, 쿠폰, 전단, 배너, 현수막 등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작'공급하고 있다. 또 전충훈 대구사회연구소 전략사업국장은 전체 사업의 기획과 코디네이터 역할을 맡았다.

전희찬 대표는 "김준호 교수가 만들었던 '기부톡' 앱의 버그를 발견하면서 서로 알게 된 사이였는데, 미리내 운동의 취지를 듣고는 기꺼이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느슨하게 시작한 운동이 점점 참여 가게가 늘어나고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소셜 벤처 전문가인 전충훈 국장을 코디네이터로 끌어들였다. 전희찬 대표는 "처음엔 얼마나 되겠느냐며 기꺼이 무상 기증을 약속했는데 워낙 짧은 기간에 참여 가게가 100곳을 넘어서면서 벌써 현판과 배너 등의 제작비가 2천만원 가까이 지출됐다"고 털어놨다.

미리내 가게의 상징은 '파랑별이'라고 불리는 미리내맨 모자와 캐릭터. 삼각형의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고 재미있는 캐릭터 모자가 미리내 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몫을 했다. 네티즌들이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등을 통해 인증샷을 올리는 단순하고 따라하기 쉬운 재미를 제공한 것. 현재 미리내 가게 카카오스토리는 11만 명이 구독하고 있고, 김준호 교수에게는 하루 1천여 개의 카카오톡이 날아오고 있을 정도다. 전충훈 국장은 "미리내 운동이 이렇게 확산될 수 있었던 데에는 비정상적인 정도를 넘어 '변태'라고 생각될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을 내던져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까지 발로 찾아가는 김준호 교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웃었다.

◆대구는 아직 미미한 수준

현재 전국의 미리내 가게는 120호점을 넘어섰다. 등록 대기 중인 가게들 숫자만 해도 50여 곳에 달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렇게 미리내 가게 운동이 빠르게 확산된 데는 내가 낸 기부금이 바로 주변의 이웃에게 곧장 전달되는 콘셉트가 주효했다. 전충훈 국장은 "사람들은 누구나 나눔을 실천하고 싶은 따뜻한 마음 한 자락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며 "여기에다 여러 사람이 좋은 일을 공유한다는 연대감까지 더해진 것이 성공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현재 미리내 운동은 일본과 스리랑카,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미리내 가게 운동은 단순히 내 이웃과 작은 나눔을 실천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전희찬 대표는 "우리 사회에 나눔에 대한 의식변화를 불러올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 마음을 열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서로가 깨달았으면 하는 소망이 담긴 운동이다. 더구나 미리내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하나 살 사람이 두 개를 구매하게 돼 가게의 매출도 덩달아 증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미리내 가게 운동이 태동하는 데 중요한 일역을 담당했던 대구지역에서의 미리내 가게는 걸음마 수준이다. 대구 달서 1호점 박서방베이커리(대백마트 내)와 대구 달성 1호점 하루커피 등 딱 두 곳뿐이다. 지난 6월 등록한 박서방베이커리 박소희(35) 대표는 "아직 대구에서는 미리내 가게 운동이 널리 알려진 게 아니다 보니 지인들을 중심으로 많이 동참해주고 있고 사장인 제가 기부하는 부분도 있다"며 "조금 길게 내다보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서서히 나눔이 자리 잡고 생활습관화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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