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 12월 15일의 차가운 겨울. 청나라 황제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은 일전불사의 항전태세를 취했지만, 오랑캐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허상'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1636년 4월 홍타이지(청 태종)는 국호를 '후금'(後金)에서 '청'(淸)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중원 공격에 나섰다. 청은 그 전 단계로서 조선에 대한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청의 군신 관계 요구는 조정을 격분시켰다. 전통적으로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군주에게 사대(事大)하라는 요구는 국왕 인조를 비롯한 정치세력 모두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처사였다. 최명길 등 일부 신료들이 주화론(主和論)이라는 타협 방안을 제시했지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 김상헌 등의 목소리가 우세했고, 조선 조정은 숙명처럼 전쟁을 받아들였다.
1636년 11월 말 청 태종은 팔기의 군사가 집결한 심양에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할 것을 선언했다. 총 병력 12만8천 여 명 가운데는 몽골인 3만과, 한족 2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12월 2일 청군은 심양을 출발하여, 12월 8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천여 명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우왕좌왕하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 피란길에 나섰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양화진 방면으로 진출하여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도 끊어져 버렸다.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12월 15일 남한산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성안에는 1만4천여 명의 인원이 약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특히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청과 화의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김상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은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했지만, 결국 최명길이 총대를 메고 인조가 항복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최명길의 옆에 있던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다시 모아 붙이는 해프닝 속에서 항복 문서가 작성되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다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한 충성은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또 찢으시면 나는 다시 붙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1월 30일 아침, 인조는 항복을 주장하는 주화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남한산성을 내려왔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조선 국왕 인조가 빨리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재촉했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부근)로 향했다.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지켜보는 가운데서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림)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야사의 기록에는 당시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히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에 조선의 온 백성은 치를 떨고 분노했다.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에 당한 치욕이었기에 국왕, 신하, 백성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전쟁의 여파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등 패전국의 아픔을 톡톡히 겪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아니 우리 역사 전체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청에 포로로 이끌려 노예시장에 팔려 갔다가 겨우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녀'라는 치욕스러운 이름만 덧붙이게 되었다. 일부 양반들은 환향녀와의 이혼 요구를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이들을 회절강(回節江:절개를 회복하는 강)에 목욕시키는 촌극도 벌어졌다. 최근에도 일본군의 노리개가 된 정신대 할머니의 아픈 사연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끌려간 공녀(貢女)와 화냥녀의 아픔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무모한 전쟁과 패배의 가장 큰 희생자는 집권층이 아니라, 민초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병주/건국대 교수·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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