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노트에서
장석남(1965∼)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ㅡ시집『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 지성사. 1995)
목하 겨울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뎌야 "앵두가 익을 무렵"을 맞이할 수 있을까. 지금 대설이니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지나 앵두가 익어가는 망종 무렵까지 어찌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가. 무슨 씨앗처럼 웅크린 채 겨울나고 밭 갈아 씨 뿌리고 모내고 돌앉아 호미 씻고 한숨 돌리는, 그, 단오 무렵.
인생의 사계를 생각해본다. 목하 겨울에 접어든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며 지내야 "앵두가 익어갈 무렵" 비로소 한 숨 돌리고 잠시나마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까. 그렇게도 그리워 한 것들과 앵두처럼 곁하여서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 될 수 있을까. 그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까무러치거나 초죽음이 되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란 가혹하게도 자연스럽다. 그런 시간들을 반드시 겪어야만 향긋한 앵두 향에 잠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다니. 목하 겨울, 옹색하게도 무언가를 그리워할 시간, 시간은 얼어있는 듯하지만, 알게 모르게 뻘뻘 땀 흘리며 흘러가고 있는 것이 분명할.
안상학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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