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전부터 중국 드나들어…한국기업 진출 성패 산증인
그만큼 중국 사정에 밝은 전문가도 드물 것이다. 중국 시장 상황과 투자 환경에 대한 지식과 현장경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하다.
전성진(63) 법무법인 대륙 상하이대표처 상임고문은 1992년 한'중 수교 직전부터 현재까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산 증인'이다. 그런 만큼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알려주고 싶고, 조언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한국기업들이 의욕만 앞세우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상당수예요. 중국 시장 한 번 제대로 둘러보지 않은 채 투자를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사업을 접고 철수하는 기업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기업 컨설팅'자문 전문가인 그에게서 한국기업들의 성공과 실패담, 중국시장 공략비법 등을 듣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20년 가까운 중국 생활
맑은 얼굴에 논리적이고 차분한 말투를 가진 그는 LG맨이었다. 1976년 LG상사에 입사해 2005년 중국본부장(부사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주로 중국과의 무역업무를 맡아왔다. 대만, 홍콩, 베이징, 상하이 등을 옮겨다니며 중국에서 생활한 것도 거의 20년이 다 돼 간다. 현재 상하이에 살면서 한국기업들의 자문과 경영지도 등을 하고 있다.
"원래부터 중국에 관심이 많아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는데 1984년 과장 시절에 대만시장 개척을 위해 지사장으로 나갔어요. 그때 한국의 사과를 수출하고 대만의 바나나를 수입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중국과 처음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대만 지사장에 이어 1985년 부장으로 승진한 후 중국시장 개척을 위한 전초기지를 홍콩에 만들기로 한 회사 방침에 따라 홍콩 지사장이 됐다. 그 때문에 1992년 수교 전부터 중국을 드나들며 무역활동을 했는데, 여수에서 만든 케미컬제품을 배에 싣고 일본을 거쳐 중국에서 하역하려다가 '적성국가'라는 이유로 배가 억류되는 어려움도 겪었다고 했다. 그러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 되는 감격스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1992년 8월 24일은 한'중 수교가 이뤄진 날이었죠. 그날의 감격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수교 전날인 23일 베이징에 있는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대표부 마당에서 직원, 종합상사 주재원들과 태극기 게양을 했는데 정말 가슴이 뿌듯했어요. 그간 미수교 국가에서 일하면서 숱한 난관과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수교 전후에 보여준 중국 당국의 확 달라진 태도도 흥미로웠다고 한다. 단적인 사례로 8월 22일 베이징에서 한국과 일본의 다이너스티컵 축구경기가 벌어졌는데 축구장 전광판에는 '남조선 대 일본'이라고 표기해 놓았다가, 수교 다음 날인 24일에는 남조선이란 명칭은 사라지고 '한국 대 북한'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교라는 것이 정말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한국기업은?
"중국에서 한국의 위상이 가장 높았던 것은 오히려 수교 직전 남조선이라 불리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중국 정부와 재계에서 한국에 대한 기대가 남달리 컸었어요. 그런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났어요.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한국기업들이 야반도주하듯 우르르 철수하고 나니 한국기업들의 실력이 완전히 발가벗겨졌지요."
현재에도 한국기업들의 중국시장 개척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했다. '중국시장은 매우 중요하고 거대한 시장'이라는 당위성만 갖고 덤비고 있을 뿐, 현장조사 부족, 현지화 실패, 부실한 인력관리 등으로 실패하는 사례가 너무나 많고, 중국기업과의 경쟁에도 밀려 철수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가 현장에서 지켜본 한국기업들의 뼈아픈 실패담이다.
#1. 1990년대 초반 한 라면 회사는 한국에서 팔던 것과 같은 제품을 들고 시장공략에 나섰지만 판매실적이 무척 저조했다. 한국인 사장이 5차례나 바뀌고 온갖 마케팅 기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인과 중국인의 식습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인은 라면을 한 끼 식사대용으로 하는 데 반해 중국인은 라면을 부요리(사이드 디시)로 먹고 있었다. 그래서 이 회사는 라면 용량을 크게 줄여 출시한 결과 실적이 어느 정도 올랐다고 한다. 회사 담당자들이 시장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쓸데없이 고생만 실컷 한 사례다.
#2. 한 식품회사는 소고기 다시다를 들고 야심만만하게 중국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나 전혀 팔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중국인들은 한국인과 달리 소고기를 아예 안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닭고기 다시다로 제품을 바꾸고 나니 제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중국인의 식습관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3. 한 제과회사는 초코파이 정(情)을 들고 중국시장에 진출했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사먹기를 꺼려했다. 맛은 문제가 없었는데 제품명이 문제였다. 중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정인(情人)이라고 하면 불륜 관계를 의미했는데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인(仁)이라고 제품명을 바꾸니 팔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진출한 한국기업의 사례도 여럿 있다고 했다. 파리바게뜨의 경우 철저한 시장조사와 직원교육 등 완벽한 준비과정을 거쳤기에 중국시장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시장은 올림픽처럼 세계적인 대표선수들의 경연장인데 한국 기업들은 한국에서처럼 마케팅을 하려다 비슷한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다"며 "발로 뛰는 현장조사와 유능한 직원 배치, 장기적인 안목의 마케팅 등 철저하고 체계적인 접근법으로 중국시장을 뚫어야 한다"고 했다.
◆내 고향은 예천
"몸은 중국에 있어도 1년에 한두 차례는 고향을 찾습니다. 고향을 위해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요."
그는 예천군 용궁면 출신이다. 7세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서 성장했으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이 얼핏 들었지만, 그는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고 경북도해외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에 매년 고향을 찾을 기회가 있다고 한다.
"1년에 한 번씩 해외자문위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하는데 그때마다 세계 각지에서 오신 다른 분들의 고생담을 많이 듣게 되는데, 저는 중국에서 너무 편하게 생활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그 회의에 참석할 때가 마음이 제일 편해요. 뿌리가 같기 때문이겠죠. 경북도와 고향 발전을 위해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박병선 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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