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도로명 주소 유감

입력 2013-12-09 07:58:56

몇 해 전 모의고사 출제를 들어갔을 때 듣기 문제 출제를 맡은 선생님이 도로명 주소 체계를 대본으로 만들어 왔었다. 거리를 그림으로 그려 놓고 하나씩 짚어 가는 형태 문제가 보기도 좋고, 문제의 난이도를 조절하기도 쉬웠기 때문에 일단 그 소재로 문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문제를 꼼꼼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출제자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꼬불꼬불하게 복잡하게 이어진 도로에서는? 재개발로 도로가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면? 도로가 제대로 구분이 안 되는 시골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해서 답답해하고 있던 차에 "미리내 길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가나?"라는 질문에 출제자는 인터넷 검색하면 된다고 했다. 모두 그럴 바엔 구주소를 검색해서 찾아가면 될 것이지 왜 혼란스럽게 행정과 국민 생활에 엄청난 혼란을 주면서까지 도로명 주소를 추진하느냐는 의견을 냈고, 정책 담당 공무원만큼 답변을 해 줄 자신이 없었던 출제자는 그 문제를 내리고 다른 문제를 출제했었다.

사실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던 문제였지만 국어 선생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주소 체계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주소 체계가 공간의 흐름을 중시한다면 구주소는 한 지역의 시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주소에 있는 지명들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는 것이고, 이 고유명사들은 우리말 역사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살았고, 지금도 부모님과 할머니가 계신 곳 구미시 도개면 가산2리는 원흥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이 주소들에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 덕을 쌓는다는(加德) 의미로 저수지를 만들었던 우리 옆 동네 이야기와 빈대 때문에 폐쇄되었다는 원흥사라는 절 이야기도 녹아 있다. 그렇지만 가산로, 가산3길과 같은 지명은 공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임의로 만든 것일 뿐 그 안에는 삶이 없다. 이에 대해 가산리와 가산로는 같은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방골 사람들과 세방로 사람들 중 어느 곳이 더 동류의식을 느끼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

문제를 출제하려고 했던 그때 보급이 되기 시작했던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이 몇 년 만에 완전히 대중화가 되어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주소를 바로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전처럼 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며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일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원하는 주소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도로명 주소의 장점이 없어진 시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현재의 주소 체계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내년 1월 1일부터 예정대로 도로명 주소만을 사용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새로운 제도가 시행될 때는 혼란과 불편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혼란과 불편함을 통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능인고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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