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지지 하라" 총부리 겨누며 협박…"총 쏴라" 뜻 굽히지
◆유교 국가 건설에의 꿈
시인 고은의 만인보 1편에 나오는 시 '김창숙' 이다. '싸가지 없는 이승만 꼬라지/ 진작부터 알았다/ 상해 임정 때도/ 이승만 노는 것 미워했다 싸웠다/ 이 싸움 내내 시들지 않아서/ 1950년대 성균관 관장 자리도 쫓겨나게 되었다/ 긴 세월/ 16년 감옥살이/ 고문으로 다리 병신 되어/ 제 걸음 걷지 못하는 세월/ 조선 유교/ 이만한 사람 있기 위하여/ 5백 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나이 눈물이 있고/ 사나이 노기 있고/ 사나이 쓰라린 기상이 있다/ 그의 노래/ 저기 저 사이비 군사들/ 맹세코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500년의 조선 유교가 키워낸 마지막 선비 심산의 꿈은 유학의 발전과 유교 국가 건설이었다. 심산이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으로 추대된 후 한 취임사는 유교 국가를 향한 열망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유교국입니다. 국가의 성쇠는 반드시 유교의 성쇠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유교문화를 크게 천명하고 나아가 우리의 유교문화를 세계만방에 선양한다면 우리 신흥국가 신흥 유교는 이 세상에 만세토록 영원히 남아 빛날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는 진부하게도 들리지만 심산은 인의예지신과 충효의 덕목이 살아 있는 유교 국가의 건설만이 신생 독립국가 한국의 나아갈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유가의 덕목을 강조한 심산의 삶은 한마디로 화이부동의 실천이었다. 옳은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되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심산은 독립투쟁 시절에도 화합과 단결을 강조했다. 임시정부가 창조냐 개조냐를 놓고 다툴 때도 화합하여 개조하는 것이 창조하여 분열하는 것보다 낫다며 분열을 막으려 애썼다. 해방 후에는 민족의 단결과 화합만이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의 성공을 가져온다며 좌우익의 합작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정당의 당수직을 마다하고 정당 활동을 않은 것도 해방정국에서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화합과 단결이 우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분열과 대립의 결과는 극렬한 다툼뿐이었다.
◆동족상잔의 전쟁
심산의 우려대로 남과 북이 각각의 단독정부를 구성한 뒤 2년도 안 돼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졌다. 분열과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 비극이었다. 전쟁의 원인을 따져보면 미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인한 분단 때문이었다. 심산은 당시의 아픈 심정을 글로 남겼다. '남북 원래 원수진 일 없으니/ 원수 갚을 일도 없는데/ 어찌 알았으랴/ 미소가 앞질러 전쟁 벌일 줄을/ 함께 화함은 합심에서 비롯되고/ 서로 양보함은/ 아량에서 오기 마련인데/ 삼한 땅 이 나라를/ 도모하는 인사들이여/ 옹고집 부려/ 화근을 만들지 마소.'
전쟁 3일 만에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은 대대적인 정치선전에 나섰다. 소련을 평화와 민주의 수호자로 내세웠고 인민군이야말로 진정한 인민의 군대라고 선전했다. 북한은 미처 피란가지 못한 남한의 여러 저명인사들을 선전에 동원했다. 김규식 안재홍 조완구 조소앙 등 항복한 남한의 인사들에게 사상전향 성명서를 쓰게 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방송에 나서게 했다. 일부 인사들에게는 '이승만이 6월 25일 새벽 참모총장에게 북침 명령을 내렸다'는 허위 방송을 하도록 했다.
피란을 못 간 심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미 정치 사회문화 언론 예술 학계의 여러 인사들이 자수 성명서를 발표했다. 심산이 누워 있던 병실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찾아와 자수 성명서를 발표하라고 협박했다. 심산은 나라에 도의가 없을 때는 말을 공손하게 하고 행동을 정중하게 한다는 뜻에서 좋은 말로 거절했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던 이승엽도 찾아왔다. 수도인민위원회를 대표해서 부하들을 거느리고 온 이승엽은 심산에게 김일성과 노동당을 지지한다는 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심산은 일단 몸이 불편하다며 거절했다. 이승엽은 방송 원고에 서명이라도 해달라고 했다. 그것도 거절했다. 심산의 거절에 이승엽은 신상에 좋지 않을 거라며 위협했다. 심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한의 이승만과도 싸워 온 심산이 북의 김일성에게 바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죽이고 싶으면 내 가슴에 총을 쏴라'며 김일성을 지지하지 못한다고 버텼다. 잔악한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은 심산이 민족분열도 모자라 전쟁까지 일으킨 김일성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총부리를 겨누던 이승엽과 부하들도 심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북한의 협박은 이어졌다. 나중에는 제자들이 심산을 숨기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후퇴할 당시 북한은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 현상윤 방응모 이광수 등 남한의 저명인사들을 납북했다. 그러나 앉은뱅이 심산은 끌고 갈 수 없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병든 몸이 전쟁의 와중에서 심산을 자유롭게 해 준 것이다. 후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2차 후퇴를 할 때는 심산도 정부와 성균관대학교를 따라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했다.
◆독재와의 싸움
부산 피란시절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이승만을 따르는 자유당의 독재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승만의 재집권을 바라는 여당과 정권을 바꾸려는 야당이 맞부딪쳤다. 전쟁 이듬해 심산은 당시 남한 땅에서 아무도 할 수 없던 일을 했다.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썼던 것이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감히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한 심산에게 당국이 내릴 수 있던 형벌은 많지 않았다. 노령이라는 구실을 붙여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여당의 집권욕은 날로 강해졌다. 1952년 정부는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의 개헌안을 냈다. 여당은 직선제가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국회에서 큰 표 차이로 부결됐다. 야당은 대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준비했다. 분위기는 야당에 유리했다. 집권세력에서 묘한 절충안을 냈다. 이른바 발췌개헌안이었다. 정부와 야당의 개헌안 중에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채택하는 대신 야당의 내각책임제 안에서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채택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와 야당의 대립 속에서 야당 의원과 재야인사들이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언대회를 열었다.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집회였다. 의장은 심산이 맡았다. 심산이 개회를 선언하는 순간 집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회의장을 습격한 폭력배들이 벽돌을 던지고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조병옥이 호위했지만 심산도 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선언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한 경찰은 심산을 구속했다. 40여 일간 감옥에서 지냈다. 이른바 부산 국제구락부 사건이었다. 발췌개헌안은 이후 국회를 통과했다. 독재 권력을 향한 심산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승만과 이승만의 비판자 심산의 갈등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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