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초창기에 삼성 라이온즈에는 김일융이란 재일교포 투수가 있었다. 삼성은 정상급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게 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급했던 삼성 구단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미우라 히사오, 즉 김일융을 엄청난 이적료를 주고 데리고 왔다.
훤칠한 몸매와 이목구비에 깍듯한 예의까지 갖춘 그에게 야구팬들은 '황금박쥐' '밤의 신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낮 경기보다 밤 경기에 더 좋은 성적을 내어서 생긴 애칭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일융은 낮이나 밤이나 다 잘 던지는 선수였다. 공 빠르기로는 왼손잡이 투수들 가운데에서 같은 삼성팀의 마무리 투수 권영호 다음이었고, 그가 던지는 커브는 싱커나 포크볼이라고 불러도 될 법한 변화무쌍함을 갖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데뷔한 1984년에 삼성 라이온즈는 롯데 자이언츠와 한국 시리즈에서 맞붙었는데, 심판은 이 왼손 투수가 오른손잡이 타자들의 무릎 근처로 꺾여 떨어지는 커브를 스트라이크로 잡아주지 않았다. TV를 보던 나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결정구 하나를 잃은 셈이었다. 끝내 3점짜리 역전 홈런을 맞은 그는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 무렵 삼성 선수들은 같은 계열사 제일모직의 SS패션이 띄운 의류 브랜드 '위크엔드'를 맞춰 입었다. 야구화도 W 모양의 글자 이미지가 파랗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신발이 신고 싶었고, 그처럼 원하는 걸 가지면 아들이 1등을 하리라고 기대했던 아버지는 내게 위크엔드 운동화를 사주셨다. 당연하지만 난 1등을 못했고, 같은 신발을 신은 삼성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위크엔드 대신 딴 야구화를 즐겨 신었다. 내가 야구장에서 직접 본 건 까만 바탕에 흰 로고로 되어 있는 나이키였다. 반짝거리는 에나멜이 눈에 거슬린 상대팀의 항의 때문이었는지, 뭣 때문이었는지 어느 때부터 김일융은 마운드 위에서 그 야구화를 신지 못했다. 대신 그는 불펜에서 기다릴 때 그 나이키를 늘 신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위는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그가 선수들과 어울려 느릿느릿 몸을 풀 때 빛을 내는 스파이크는 유난히 튀었고 외로워 보였다.
그 시절부터 30년 가까이 흘렀다. 내부 규율을 중시하는 삼성 선수단에도 안지만, 박석민처럼 개성 넘치는 스타들이 생겼다. 나는 왕년의 김일융에게 느꼈던 '언밸런스'를 교복 입은 학생들로부터 받는다. 어찌 되었든 교복은 모양새가 같다. 그런데 규제로부터 벗어난 운동화와 가방과 외투는 교복이 가진 정돈됨으로부터 벗어나 화려함 일색이다. 비싼 상표가 붙은 옷을 입어야만 따돌림당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돈다. 우리 아이들 모두가 한 팀처럼 움직이는 운동선수는 아니지 않나. 지금 같은 교복 정책이라면 없느니 못하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klaatu84@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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