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치에 노릇노릇 구워나온 고기…원시시대부터 즐긴 사냥터 음식
양고기나 소고기를 쇠꼬챙이에 꿰어 숯불에 굽는 러시아 전통음식 샤슬릭(Shashlyk)은 러시아 국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서민 음식이다. 샤슬릭은 원래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 등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원조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지구촌 세계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즐기는 음식으로 봐야 한다. '불 피우고 고기 굽고'라는 간단한 야외 즉석요리는 원시 인류의 식습관이 생식(生食)에서 화식(火食)으로 바뀐 그 순간부터 시작돼 가장 간단하고 가장 오래된 조리방식이기 때문이다. 소금 이외에 별다른 양념도 필요 없어 우리나라 삼겹살 구이도 쇠꼬챙이만 추가하면 세계인들이 즐기는 멋진 한식 소재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러시아 샤슬릭을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꼬치구이 샤슬릭과 어울리는 러시아 보드카
2012년 9월 제20차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몰라볼 정도로 변신했다. "작년 초만 해도 공항서 시내까지 서너 시간 걸렸는데 도로가 잘 정비되면서 이제 40분이면 도착해요." 블라디보스토크 국립대에 유학 중인 최봉호(25) 씨는 만나자마자 허허벌판 같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황량한 옛 모습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고는 곧장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러시아 전통음식 전문점으로 안내한다. 가는 길 내내 삼성과 현대, LG 등 국내 대기업의 대형 광고판을 가리키며 블라디보스토크 진출 상황도 설명해 준다.
"러시아에서는 새고기가 제일 비쌉니다. 부르는 게 금이지요. 그다음이 송아지고기, 소고기 그리고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순입니다." 새고기로 만든 샤슬릭은 고급 레스토랑에 있다는 것만 들어 봤지 먹어 보지는 못했다고. 일반 레스토랑에서는 보통 재료를 구하기 쉽고 가격이 저렴한 양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이용해 샤슬릭을 만든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의 대표적인 전통 먹거리 타운 나베르지나야 스트리트에 자리한 '드바 그루지나'라는 레스토랑은 한국인이 즐겨 찾을 정도로 전통 스타일의 샤슬릭으로 유명하다.
"샤슬릭은 먼저 주문해야 합니다. 숯불에 구워 내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니까요." 종업원 로만(27) 씨는 '꾸리짜'라는 닭고기 샤슬릭과 '바라니나'라는 양고기, 그리고 '스비니나'라는 돼지고기 샤슬릭이 레스토랑 특미 메뉴라고 권한다. 주문을 하자마자 '모르스'라는 산딸기를 삭혀 만든 음료를 가져 온다. 새콤달콤한 맛이 샤슬릭의 느끼함을 덜어 준다고 설명한다. 붉은 빛깔의 모르스는 러시아판 안동식혜 맛을 닮았다. 이어 '로바쉬'라는 부드러운 빵과 함께 마요네즈로 버무린 토마토 샐러드, 그리고 '굽다'라는 수프를 낸다. 굽다는 미트볼과 감자를 넣고 끓인 홍당무국으로 향채와 월계수 잎을 띄웠다. 약간의 중국풍이 난다.
"부꾸스나!"(맛있어요!)
맨 먼저 나온 샤슬릭이 꾸리짜다. 로만 씨는 접시를 내려놓고 슬쩍 엄지를 펴 보인다. 껍질째 잘라 쇠꼬챙이에 꿰어 구운 닭고기가 먹음직스럽다. 직화구이로 닭껍질이 바삭하게 익었다. 생양파를 채 썰어 곁들인 게 눈길을 끈다. 이어 스비니나도 마찬가지로 노릇하게 구웠다. 고깃덩이가 한입에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큼직큼직하다. 소금 간을 하고 약간의 후추를 뿌려 돼지고기의 느끼함을 없앴다. 바라니나도 꼬챙이째로 구워 접시에 담아냈다. 약간 탄 듯 가무스름하게 구워진 양고기는 보기에도 군침이 돈다. "샤슬릭 한 점엔 보드카 한 잔입니다." 샤슬릭을 갖다놓고서 로만 씨는 자꾸 보드카 주문을 졸라댄다. 사실 샤슬릭은 러시아 보드카 매출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기름진 음식이라고 동행한 최봉호 씨가 슬쩍 귀띔한다.
◆고기는 레드와인으로 차가운 곳에서 하룻밤 재워
"빠브로 브이쩨."(드셔 보세요)
쇠꼬챙이째로 샤슬릭을 들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매니저 따냐(29) 씨가 다가와 먹지 않고 뭘 하느냐며 묻는다. 갓 구워 내 고기 기름기가 지글거리는 샤슬릭을 한입 베어 무니 잘 굽힌 고기의 풍미가 입안 가득 전해온다. 고소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다 할 조미료가 들어가는 게 없으니 본래의 고기맛이 그대로 살아 있다. 소금으로만 간을 했다고 하는데도 감칠맛이 난다. 꼬챙이에서 고깃덩이를 하나씩 빼내 칼로 썰어 먹는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40도짜리 독한 보드카 '루스키스탄다르트' 한 잔이면 느끼하게 느껴지는 구운 고기 식감이 금세 사라져 버린다. 로바쉬 빵에 고기를 잘라 넣어 먹는 맛도 이채롭다. 따지고 보면 고깃덩이를 그냥 구워서 접시에 담아 낸다면 샤슬릭도 그리 멋진 음식이 아니다. 쇠꼬챙이에 꽂혀 있으니 바로 샤슬릭이고 야외 캠핑 온 것처럼 기분이 들뜬 채로 파티를 하듯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레스토랑의 자랑거리는 주방입니다. 샤슬릭을 만드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췄지요." 따냐 씨가 안내하는 주방 내부는 반듯하고 주방기구가 가지런하게 걸려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만 있는 만갈(Mangal)이라고 하는 샤슬릭 전용 그릴도 준비되어 있다. 두꺼운 목재로 내부를 꾸며 러시아 전통 분위기를 잘 살려 두고 있다.
드바 그루지나 레스토랑에서 샤슬릭을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양고기와 돼지고기 또는 닭고기를 잘라 쇠꼬챙이에 꽂기 쉽도록 조각을 만든다. 이를 그릇에 담고 소금과 후추로 맛을 낸 다음 양파를 링 모양으로 썰어서 버무린다. 레몬주스를 조금 넣고 꾹꾹 눌러 뒀다가 붉은 포도주에 담가 차가운 곳에서 하룻밤을 재운다.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충분히 숙성되면 쇠꼬챙이에 끼우고, 고기 사이사이에 양파를 끼우기도 한다. 그릴에 굽되 불꽃 위는 피하고 숯불이 이글거리는 가장 뜨거운 곳에서 15분 또는 20분간 천천히 굽는다고 한다. 그리 어려운 과정은 아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동부지역 샤슬릭은 이처럼 긴 꼬챙이에 살코기 또는 지방질과 양파, 토마토를 함께 꽂아 후추를 뿌리고 그릴에 직접 구워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맛있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제야 매니저 따냐 씨가 웃으면서 '다스비다냐'라고 한다. '다시 또 봐요'라는 뜻으로 헤어질 때 쓰는 러시아 인사말이다. 처음 식당에 들어섰을 땐 지나가는 사람 보듯 하던 무뚝뚝하기만 한 러시아 사람도 잠깐 동안에 정을 낼 줄 아는가 보다.
◆지구촌 세계인들이 즐기는 쇠꼬챙이 숯불구이
샤슬릭의 산업적 가치를 살펴보면 가장 큰 특징이 지구촌 곳곳마다 '쇠꼬챙이 숯불구이'라는 유형의 음식 조리기법이 없는 곳이 없다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꼬치구이는 지구촌 세계인들이면 누구에게도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음식 형태라는 말이 된다. 러시아만 보더라도 광활한 러시아 내에서 어디서든지 맛볼 수 있는 가장 일반화된 음식으로 안정적인 고기 소비의 주역이기도 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팔기도 하지만 길거리 노점에서 석탄불을 이용한 즉석구이도 인기가 높다. 그만큼 러시아에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계층이 보드카 한 잔에 샤슬릭 한 점을 스스럼없이 즐긴다는 점이다.
러시아 이외에도 같은 유형의 음식은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구 소련권은 물론이고 동유럽국가에서도 샤슬릭과 같은 꼬치구이를 한다. 쇠꼬챙이에 야채와 고기를 함께 꽂아 구워낸 터키의 '시시케밥'도 샤슬릭과 닮았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음식 '코로밧'도 쇠꼬챙이에 고깃덩이나 미트볼을 꿰어 구워 낸 음식이다. 이란의 '카밥 바르그'와 '카밥 쿠비데'도 마찬가지. 달궈진 쇠꼬챙이에 손이 데지 않도록 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만 다를 뿐이다. 마른 빵과 곁들여 먹는 그리스의 '수블라키'도 같은 쇠꼬챙이 구이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서도 '사떼'라고 하는 대나무 꼬치구이가 있고, 중국 대륙에선 '양로추완'이라는 양꼬치 구이가 샤슬릭과 똑같은 유형이다. 다만 쇠꼬챙이가 가늘고 고깃덩이의 크기만 작을 뿐이다. 북미대륙 인디언 부족들도 쇠꼬챙이를 이용한 전통적인 모닥불 구이를 즐긴다. 이는 국가 정상들이 모여 회담 후 리셉션 이벤트로 선보이기도 했다. 야외에서 즐기는 우리의 삼겹살 구이도 석쇠를 쓰는 형태만 다를 뿐 숯불에 직화구이를 한다는 자체는 마찬가지 유형이다. 해변이나 목초지 등 지역 여건과 종교 관습에 따라 쇠꼬챙이에 꿰는 고기의 종류가 바뀔 뿐이지 어디든지 거의 흡사하다. 그러니 샤슬릭은 가히 지구촌 음식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지구촌에 광범위한 꼬치구이 형태와 세계인의 보편적 음식인 샤슬릭의 요리기법에 대해 농촌진흥청 한식세계화 연구관 한귀정 박사는 그 활용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꼬치구이는 우리 한식에서도 산적과 너비아니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면서 "샤슬릭처럼 지구촌 세계인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조리기법을 잘 접목할 경우 한식 세계화에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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