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학의 시와 함께] 오늘 나는-심보선(1970~)

입력 2013-11-28 07:02:31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 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 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문학과지성사, 2008)

오늘 여기 내가 있다. 나는, 과거는 다 잊고 미래는 다 알고 있는 성격을 지녔다. 현실은 무관심이다. 오직 하나 절박한 행위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며,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이동하여 "한 여자를 사랑하게"되는 결론에 이른다. 오늘 내가 한 전모다.

다시 말해서, 오늘 여기 내가 있다. 한 여자에게 꽂혔으며,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과거도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미래라도 다 감당할 각오다. 한 여자의 얼굴에 꽂힌 시선 밖의 각도는 모두 지워지고 없다. 집중과 외곬이다.

오직 너다. 격렬한 사랑일수록 어둠이 예비된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둠을 건너가야만 민얼굴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여자일 수 있고, 시대일 수 있고, 한 세상일 수 있다. 대상이 무엇이든 결행이란 늘 무모해서 아름답다. 사랑을 위하여 어둠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과정은 그리하여 번제를 닮았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