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되면 동족 상잔의 재앙 온다" 단독정부 수립 그렇게 말렸건만…
심산은 정치적 야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권력에 초연한 맑은 사람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대의는 해방된 이후 통일정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졌다. 자주독립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꿈이 없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기에 그는 해방정국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심산은 격동하는 정국의 흐름에서 자신의 입지를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 무리를 지어 야심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타협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과 손잡을 일도 없었고 이승만이나 한민당과도 타협할 이유가 없었다. 독립운동의 동지인 김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심산은 정치적 반대자나 심지어 동지들에게도 성가시고 완고한 고집불통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타협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권력은 쥐어지지 않는다. 심산에게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줄 게 없었고 해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겨줄 자리도 없었고 쥐여 줄 돈도 없었다. 건국사업에 필요한 것은 돈이라는 이승만의 말에 민족의 단결이 중요할 뿐 돈은 그다음 문제라고 답한 심산은 단순한 사람이었다. 이해관계를 따져 곡예를 펼칠 재주도 없었고 재주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옳은 일이면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굽히지 않았고 잘못된 일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대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얻을 게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해방 정국은 혼돈의 시대였다. 격동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다. 심산은 상대가 싫어할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려고 않았기에 무리를 만들어 합종연횡하며 타협하지 않았다. 생각과 다른 말로 대중을 현혹할 필요가 없었다. 대의에 어긋나면 꾸짖었고 대의에 맞는 일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미소공위의 결렬
민주의원들이 우여곡절 끝에 참여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는 심산의 예측대로 결렬됐다. 소련이 반탁에 나선 남한 내 우익단체들의 공위 참여를 배척하면서 1차 미소공위는 50여 일 만에 끝났다. 이듬해 열린 2차 회의도 마찬가지였다. 공위에 참여시킬 단체의 수와 자격 등을 놓고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아무 소득 없이 결렬됐다. 결렬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승만은 1차 미소공위 결렬 후 일찌감치 남한만이라도 자율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승만의 자율정부를 좌익은 물론 한독당을 위시한 우익도 단독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정치적 지원을 받던 한민당을 제외한 남한 내 좌우익은 일제히 단독정부를 반대했다.
그러나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과 국토분단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이미 이승만이 김구 등 경쟁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결과가 나타났다.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은 남한에서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대중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찬탁으로 돌아섰던 공산당은 남한 대중들의 찬탁에 대한 거부감으로 지지도에 있어서 우익과 완전히 역전됐다. 찬탁이 부메랑이 되어 좌익을 친 것이다. 백범과 김규식 여운형이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지만 이승만의 독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미국과 남한 내 최대 보수 세력의 결집체 한민당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을 대중들도 지도자로 가장 높게 평가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까마득한 선배 박헌영을 이미 추월했다. 북한의 최고 실력자로 부각하고 있었다.
남과 북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게 한반도는 냉전의 주 싸움터였다.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만 않았을 뿐 미국과 소련은 정치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세계를 무대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두고서도 미국과 소련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한반도에 자본주의를 심으려는 미국과 한반도를 사회주의 나라로 만들려는 소련. 양국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의 분단은 불가피했다.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와 집단도 누구 하나 먼저 양보하지 않았다. 통일정부를 내세우며 분단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려 했을 뿐 먼저 38선을 허물려고 하지 않았다. 남과 북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택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첨예한 싸움터였고 남북의 정치 주역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았다. 남북의 분단은 이승만과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당시 남북 집권자들의 책임이라기보다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는지도 모른다.
◆남북협상
2차 미소공위의 결렬 이후 한국 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한국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로 국회와 정부 수립'이라는 UN의 결의 이후 남북 분단은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심산은 백범과 김규식 등과 민족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며 남북협상을 모색했다. 통일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밝히는 성명서를 통해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은 막아야 한다며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자고 호소했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남북이 제갈 길을 찾아 이미 멀리 달려간 상황에서 남북협상은 공허한 일이었다.
심산과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등 이른바 7 거두 공동성명서는 남북 분단이 가져올 동족상잔의 재앙을 예고했다. 반쪽이나마 먼저 수립하고 그다음 반쪽에서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듯하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이 모두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불러올 뿐이라고 경고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여생을 바치기로 맹세한다고 했다. 그러나 백범과 심산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노력은 남북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백범과 심산이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단독정부 수립은 막을 수 없었다. 38선 이남에서는 UN소총회의 결의(가능한 지역에서 만의 총선거)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됐다. 석 달 뒤인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역사에 등장했다. 북에서도 비슷한 시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말로는 통일정부를 외치며 상대를 비난하던 남과 북의 정치 주역들이 서로 경쟁하듯 보폭을 맞춘 것이다. 남북에 이념이 판이하게 다른 단독정부가 세워진 이후 통일은 현실과 멀어졌다. 통일은 동족의 상잔을 불러올 재앙의 씨앗일 뿐이었다 .
해방 이후 현실 정치 무대에서 심산은 결코 주연이 아니었다. 격동의 무대를 이끌고 가기에는 너무나 단순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분단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대신 분단을 인정하고 대세에 적응한 사람들은 남과 북에서 제각각 주연으로 등장했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심산의 정치적 영향력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산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 시대 심산은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재야의 선봉으로 변신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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