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의 줌 인] '헝거게임', 현실의 알레고리가 된 판타지

입력 2013-11-21 07:07:39

혁명불꽃 일으킨 소녀의 활시위

헝거게임
헝거게임

2000년대 들어 할리우드는 아이디어의 부족을 주로 두 매체를 통해 메우고 있다. 하나는 원작 만화이고, 다른 하나는 판타지 소설인데, 전자가 주로 '아이언맨'이나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 신적 영웅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트와일라잇' 등 신화적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흥미롭게도 두 분야의 영화는 모두 연작으로 만들어져 할리우드의 아이디어 고갈을 계속해서 메워주고 있는데, 이제 후자의 목록에 '헝거게임'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헝거게임'은 이미 원작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 해서 단순한 판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에 대한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헝거게임'은 원작 만화를 배경으로 한 신화적 영웅 이야기와는 다르게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가 등장하지 않고, 판타지 소설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는 다르게 신화적인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리고 있지 않다. '헝거게임'은 가상의 독재 국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모습 같기도 하고 미래의 모습 같기도 한 기묘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켜 인간 본연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현대 사회의 통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작년에 개봉한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영화의 서막이었다. 12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독재국가 '판엠'이 배경이다. 수도이자 중심지인 캐피톨에 저항했던 12구역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자는 헝거게임을 만드는데, 이 게임은 일 년에 한 번 각 구역에서 추첨을 통해 두 명을 선발해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벌이는 지독한 생존게임이다. 독재자는 이 게임이 존재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피지배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그 희망이 너무 강하면 폭동이 되기 때문에 체제 유지를 위해 '작은'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피지배자가 살아갈 작은 희망을 주어야 폭동도 없고 자멸도 없이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그려진 판엠은 지독한 통제사회이다. 독재자가 개인의 모든 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곳. 게다가 수시로 강력한 군대를 통해 무력으로 탄압하는 사회이며, 12구역을 경제적으로 혹독하게 착취하는 사회이다. 캐피톨 사람들은 12구역의 피지배자들이 일한 대가로 편히 쉬면서 안락하게 지낸다. 심지어 헝거게임을 벌이는 이 모든 과정을 생방송으로 보여준다. 식민주의의 철저한 재현이다.

1편에서 동생을 대신해 나갔다가 우승한 캣니스는 2편인 '헝거게임: 캐칭 파이어'에서 다시, 기구하게도 헝거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왜? 헝거게임 최초로 두 명의 동반 우승자가 생기면서 캣니스는 서서히 절대권력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특히 각 구역을 돌면서 벌이는 행사에서 사람들은 캣니스에게 강하게 반응한다. 그녀가 보여준 인간적인 면과 강한 매력은 피지배자들에게 희망을 보게 만들었다. 지배하기 위해 적당한 희망을 주길 원했던 독재자는 피지배자들이 저항의 희망을 가지자 다른 대책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전 대회 우승자들만 벌이는 헝거게임이다. 물론 속셈은 캣니스를 제거하기 위한 것.

영화는 1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간다. 사실 두 영화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1편이 조공인으로 추첨 되어 캐피톨로 가 헝거게임을 벌여 생존하는 내용이라면, 2편은 생존 후 각 구역을 돌다가 다시 캐피톨로 가 헝거게임을 벌이는 것.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야기는 대부분의 속편이 그런 것처럼 강하게 발전한다. 1편이 헝거게임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2편에서는 시각적으로나 지능적으로 더 강한 헝거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반란의 불씨를 보여준다. 말 그대로 캣니스는 혁명의 불꽃이 된 것이다.

헝거게임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은 영화가 선과 악의 단순한 신화적 대결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다루면서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생존의 본능이 있고, 계급으로 선명하게 구분되어 다른 삶을 누리는 인간들이 있으며, 그 유지의 근간은 피식민지에 대한 착취이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독재자가 있다. 결국 '헝거게임'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미래를 논한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면 기존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피식민지의 모습을 볼 때에는 나치 수용소를 보는 것 같고, 헝거게임의 입장 장면은 고대 로마의 경기장 같으며, 헝거게임을 생중계하는 시스템은 '트루먼쇼'를 연상시키고, 헝거게임 장면에서는 숱한 블록버스터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미래에는 치밀한 독재자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헝거게임'은 판타지이지만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강성률/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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