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길 위의 낯선 풍경들

입력 2013-11-12 07:40:46

집을 떠나 딸아이네가 사는 이곳 미국 코네티컷주 그리니치로 건너온 지 벌써 열흘째. 아직도 밤낮이 뒤죽박죽 엉킵니다.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새벽인가 하고 일어나 보면,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저들끼리 살아서 자정 무렵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어둠의, 정적의 감옥입니다. 고양이 걸음으로 가만가만 창가로 다가가 커튼 사이로 바깥 풍경을 훔쳐봅니다. 사람도, 개도, 집도, 나무도, 풀벌레도 모두모두 어둠 속에 묻힌 밤, 큰 나뭇가지 사이로 조각달이 떠가고 있습니다. 눈 뜬 생각은 또 그 조각달을 따라나섭니다.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거실벽에다 가져가야 할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놓고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면서, 잠시나마 거처를 옮기는 일이란 게 참으로 번거롭고 복잡하다는 걸 새삼 절감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물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하찮은 물건 하나 없어도 얼마나 큰 불편을 느끼는지. 그리고 그 일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매일 복용해야 하는 혈압약부터 평소 자주 찾는 위장약, 감기약, 두통약, 진통제, 연고, 파스 등의 약품 석 달치를 사다 늘어놓고 보니 웬만한 시골 약방 수준이어서, 그걸 보며 그간 내가 약방을 짊어지고 살아왔구나, 내 몸이 참 많이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에 몸한테 미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제 삶의 여행가방을 열어놓고 잠시 머무는 이 낯선 도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공간은 익숙한 '여기'일 뿐일지 모르지만 제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낯선 '저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가을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숲 속에 드문드문 늘어선 집들, 그 지붕들을 곱게 물든 잎으로 살짝살짝 가리며 뚜벅뚜벅 걸어다니는 아름드리 키 큰 나무들, 그 높은 가지 위로 흐르는 파란 하늘. 어느 거리를 걸어도 아름다운 단풍나무 숲 속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핼러윈 축제 또한 신기하고 재미나는 풍경이었습니다. 축제를 며칠 앞두고부터 사람들은, 붉은 호박과 망사거미줄과 권총을 찬 허수아비와 해골과 온갖 가면들로 정원이나 현관 입구를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낯선 축제에 한다리 걸치기 위해서 지난 일요일에는, 제 엄마 아빠를 졸라 호박을 사러 가는 손자 녀석들을 따라나섰습니다. 고속도로를 한 시간여 달려 도착한 호박 농장, 핼러윈 축제는 이미 그 농장에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호박을 늘어놓은 길가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흥청거리며 들끓고, 또 그 주변으로는 시골장터의 노천 국밥집처럼 팝콘이나 도넛, 피자를 파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옥수수대궁 몇 개로 얼기설기 꾸민 가설무대에서는 청바지 차림의 청년 너덧이 흥겨운 춤곡을 연주하며 사람들의 어깨를 흔들어댔습니다.

호박을 사고파는 흥정 또한 주인과 고객이 어울려 연출하는 콩트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마녀 분장을 한 주인은 고객들이 직접 골라 손수레에 싣고 온 호박값을 미리 말하지 않고 먼저 내기를 걸었습니다. 골라온 호박의 무게를 정확히 알아맞히면 공짜로 주겠다고. 대신 알아맞히지 못하면 호박값을 비싸게 받겠다고. 계산대 앞에서 식구들끼리 호박을 돌아가며 들어보고는 무게를 합의하느라 시끌벅적 떠들어대다가 저울 위에 호박을 올려놓는 순간, 손뼉을 치며 환호하거나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한바탕 웃음판이 폭죽처럼 터졌습니다.

드디어 축제 당일, 사람들은 일찍부터 현관의 호박등에 불을 밝히고 숨죽여 기다리는데, 서쪽 하늘 아래로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옅은 어둠 속에서 온갖 가면을 쓴 아이들이 손에 랜턴과 사탕 바구니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오고, 이어서 어른들이 뒤따르자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축제의 물결로 넘쳤습니다. 아이들은 떼를 지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야!"라고 외치면 집주인은 또 현관문을 열고 나와 사탕을 나눠주며 덕담을 건넸습니다. 사탕을 얻어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깨들깨들 어둠 속을 떠다니고, 하늘에선 또 수많은 별들이 재조갈재조갈 떠들어대는 밤이었습니다.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를 걷다 보면 문득문득 온전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되어 지치고 힘들어도 마음은 한없이 맑아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네 일상은 얼마나 습관적이고, 상투적이고, 과거지향적이고, 도식적이고 고착된 관습의 철조망에 갇혀 있는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아 삶의 생기를 얻고 삶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길을 나서는가 봅니다.

정말 좋은 여행이란 길 위에서 길을 잃는 것이라지요. 미리 짜여진 계획과 일정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고 낯선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것. 여행가이드북의 정보에 갇히지 말고 낯선 풍경을 직접 만날 것. 풍경의 민낯을 물끄러미, 정말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것. 바라보는 일을 절대 카메라에 넘기지 말 것.

김동국/시인 poetkim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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