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파락호 종손

입력 2013-11-12 07:41:34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의성 김씨 학봉종택 13대 종손 김용환은 유명한 노름꾼으로 알려졌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당대에 집안을 말아먹은 전형적인 파락호(破落戶)로 소문이 자자했다.

노름판에 빠져 현재의 시가로 200억원에 달하는 종가의 전답을 팔아먹은 것은 물론, 본인이 살던 종갓집마저 날려버리자 문중에서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되사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집갈 때 혼수품을 사오라고 시집에서 맡긴 돈마저 써버리고는 헌 장롱을 가져가게 했다. 그러니 일가친척과 지역 주민들의 원망과 탄식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김용환은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채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사실이 해방이 되고 나서야 밝혀졌다. 그가 파락호로 온갖 수모와 비난을 감수하면서 남몰래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김용환의 조부 서산 김흥락은 퇴계 학맥을 이은 선비로 집안은 물론 유림의 존경을 받는 큰 어른이었다.

그런데 10세 소년 김용환의 눈에 하늘과도 같았던 조부가 의병에 참가한 사촌 동생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종가 마당에 무릎을 꿇리는 치욕스런 광경이 벌어졌다.

그가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작심한 뼈아픈 계기였다. 혼수금까지 노름밑천으로 가져간 아버지를 평생 원망했던 딸은 김용환 선생이 건국훈장을 추서 받던 날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존경의 마음을 담은 서간문을 남겼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 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지난 금요일 한국 국학진흥원이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종가 포럼에서 선보인 창작연극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는 바로 김용환 선생의 극적인 삶을 조명한 것이다. 과연 그는 불천위(不遷位)를 모시는 명문가의 종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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