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人 세계 In] <20>태국 자이나 인터내셔널 그룹 대표 이형배

입력 2013-11-11 07:30:39

섬유 꿈 품고 간 태국 앗! 中이 시장 장악…커튼 붐 일으켜 부활

태국 이민 21년째. 영업의 달인 이형배 대표는 우스갯소리로
태국 이민 21년째. 영업의 달인 이형배 대표는 우스갯소리로 "북극에 가서 냉장고를 팔라면 팔 수 있겠지만 태국에서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리에게 관광지로 친근한 나라 태국. 하지만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사업 분야에서는 한국인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삼성전자와 LG전자 같은 글로벌기업조차도 최근에야 겨우 가전 분야에 진출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수준이다. 일본인과 중국계가 시장 구석구석 경제권을 장악한 세월의 장벽과 입헌군주제라는 특수한 사회구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이 나라에서 사업을 통해 성과를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자이나 인터내셔널 그룹(Zaina International Group Co. Ltd)의 이형배(57) 대표는 이처럼 사업하기 어려운 태국 시장에서 직원 80명을 거느린 제조업체를 일궈낸 교민 기업인이다.

◆영업의 귀재도 고전을 면치 못한 태국 시장

1992년 이 대표는 사업가의 꿈을 품고 태국 땅을 밟았다. 국내 섬유 무역업계에서 '영업의 귀재'로 통했던 그는 섬유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동남아행을 결심했다. 더 이상 한국을 찾지 않는 원단 매입 바이어들을 찾아 자신의 영업 무대를 옮겨야 생존할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패기만만했다. 9년간 섬유 영업을 하면서 동남아지역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기에 쉽게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이 나라의 사업 환경과 문화에 제대로 적응해 성과를 거두기까지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초창기에는 너무 힘들었죠. 접대도 통하지 않고,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해도 거절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한국에서 하던 영업 방식으로는 안 되더군요."

이 나라 섬유 업계 큰손 중에는 중국계가 많았다. 중국 사회에서 중시된다는 '관시'(關係'친분관계)가 여기서도 적용돼 인내심이 필요했다. 하찮은 소액 거래라도 이것이 꾸준히 이어져야 대규모 계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현지 이름을 중국인에게 친숙한 '재키 찬'(Jackie Chan'성룡)을 흉내 낸 '재키 리'(Jacky Lee)로 할 만큼 영업에 의지를 보였지만 사업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인터넷 힘이 점점 커지다 보니 영어 좀 하고 한국 업체 좀 안다고 큰소리치는 게 먹히는 시절도 머지않아 막을 내릴 것이라 그는 예상했다. 원단 장사는 비전이 없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규모가 작은 것이라도 제조업을 해야 했다.

◆커튼 장사로 일어서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커튼이었다. 당시 태국은 커튼 불모지였다. 유럽식 고급 주택에만 커튼을 달았는데 고급 주택 건설 붐이 일면서 커튼 시장이 급성장했다. 부유층 상대로 영업을 뛰었다. 일단 사업이 아니라 장사라는 생각으로 덤볐지만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줄자로 측정하고 가격을 산출하는 데만 꼬박 하루 반나절이 걸릴 정도로 주택 규모가 엄청났다. 1가구당 견적이 1억5천만원에 달했다. 장사치고는 매출 규모가 커 이익이 많이 났다. 게다가 커튼 원단을 유럽을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 직수입해 4배 이상의 마진을 남겼다.

대박의 꿈이 보였다. 태국 전역을 1년 반 동안 운전기사랑 직접 다니며 영업망을 뚫었다. 이때 파악한 인테리어 커튼 가게가 7천여 곳이나 됐다.

"이 나라는 지방 유지가 커뮤니티를 이끌어 가는 사회구조다 보니 이들의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이 사람들과 접촉해서 신뢰를 쌓아 영업망을 빠르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박의 꿈도 잠시, 태국의 독특한 비즈니스 환경은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소매상으로부터 결제 대금으로 수표를 받은 것이 실수였다. 어음제도가 없는 이 나라에서는 한마디로 '부도'라는 개념이 없었다. 결제금 회수를 못 하고 결국 민사소송까지 진행해야 했다. 그래도 소송은 소송대로 하고 사업은 사업대로 진행했다. 마침 한국에 버티컬(커튼을 다는 막대) 재고가 많았는데, 태국에서 버티컬이 막 유행을 탈 때였다. 부도를 낸 소매상에 가서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가격을 더 높게 받고 한국에서 가져온 재고를 판매했다.

"이런 식으로 살을 붙여서 떼일 뻔한 결제 대금을 거의 다 회수했습니다. 그러니 현지인들 사이에 이 사람은 태국을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좋은 평판이 돌더군요. 커튼 업계에 재키 리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허허허."

현재 방콕 수안롱공업단지에 자리한 그의 회사는 고급 커튼을 제작, 79개 총판을 통해 태국 전역에 판매하고 있다.

◆노는 것도 재능

그가 들려준 시행착오는 실패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에 대해 "스스로의 재능에 도전하고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1957년 경북 안동 태생인 이형배 대표는 안동고와 건국대 섬유공학과를 나왔다.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목표는 놀면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틀에 박힌 조직 생활보다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직장생활은 자신의 끼와 사업 수완을 가늠해보는 시험대에 불과했다. 그래서 운신의 폭이 좁은 대기업보다도 종횡무진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중소기업이 더 좋았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중소 섬유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대기업에 입사한 동기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이들이 복사 심부름이나 하고 있을 때 그는 홍콩, 동남아 출장을 다녔다. 물 만난 고기처럼 입사 6개월 만에 대기업과의 거래를 척척 성사시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 당시 섬유공학과 선배들이 국제상사, 코오롱, 삼성물산 등 대기업에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노는 재능'으로 다져놓은 인맥이 통했다.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도 뿌리치고 그는 직장생활 4년 만에 미련 없이 독립해 오퍼상을 열었다.

이 대표는 취업난을 겪고 있는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대기업에 들어가면 톱니바퀴 하나 역할도 못 한다"며 "대기업에서 하는 노력의 100분의 1만 해도 중소기업에서 성공하는 인재로 클 수 있다"고 했다. 또 "위기일수록 자신의 재능을 찾고 소셜네트워크 등을 활용해 기회를 만들라"고 조언했다.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는 거다.

태국 방콕에서 글'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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