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진출 시대적 배경
1960년 전까지는 유학생 신분으로 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에 인턴, 레지던트 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의료 공백이 우려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의사들의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정원을 제한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시적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들을 받기 시작했다.
1960년부터 'ECFMG'(Educational Council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라는 미국 의사시험을 우리나라에서 칠 수 있게 됐다. 1958년 미국에서 시작된 ECFMG는 외국 의과대학 졸업자를 위한 평가시험이다. 외국 의과대학을 마친 사람들이 미국 인턴'레지던트 등 의료 연수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는지 평가하는 것. 의학뿐 아니라 영어능력 평가도 한다.
미국에서 의료를 배우고 의사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선 꿈 같은 일이었다. 시험이 도입됐다고 하지만 어디서 원서를 받고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경북대 의대 동문들은 서울에 있는 동료 의사들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방에서 그런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괜히 창피당하지 말라며 면박을 들었다.
그러던 중 1961년부터 한두 명씩 졸업생이 시험에 합격해 미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963년부터는 경북대 의대 졸업생들도 대거 시험을 치렀다. 물론 시험은 졸업 전에 치르게 된다. 1963년 40여 명이 합격한 것을 계기로 엄청나게 늘기 시작했다. 한때는 졸업생의 절반 정도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런 현상은 1968년까지 계속됐다.
열심히 공부한 동문들은 2년 만에 레지던트를 마치고 미국에서 개업하기도 했다. 미국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필리핀 한 국립대의 경우 의대 정원을 200명에서 700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외국인 의사가 급격히 늘어나자 미국 의사회는 외국인 의사 조건을 강화할 것을 요구했고, 1970년부터는 미국에 와서 시험을 칠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인턴 과정을 마치지 않으면 시험을 칠 수 없도록 강화하기도 했다. 비록 한국에서 시험을 치를 기회는 남아 있었지만 숫자는 대폭 줄었다.
경북대 의대의 경우 1971년 20명가량에서 1972년 10명, 1973년 3명 등으로 줄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리핀 마닐라의 경우, 의과대학 졸업생들이 취직할 자리가 없어서 택시를 운전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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