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⑬권력에 초연한 원칙주의

입력 2013-11-09 07:20:47

"미·소 양국 기대는 일은 권력욕에 사로집힌 매국 행위"

◆고착화되는 남북

해방은 됐으나 자주독립의 나라 조선은 아직 요원했다. 신탁통치를 놓고 벌어진 찬반 논쟁은 미국과 소련이 진주한 남과 북을 멀어지게 했다. 남북으로의 분단은 고착화됐고 이념만 아니라 땅과 사람까지도 갈라서게 만들었다. 우익을 중심으로 반탁운동을 벌이는 측에서는 신탁통치의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신탁통치라는 말에서 느끼는 대중의 반감을 자극했다. 찬탁 운동으로 돌아선 좌익도 대중의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막 벗어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에게 신탁통치는 결코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신탁통치를 놓고 벌인 좌우익의 싸움은 합리적 논쟁이 아니라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탁통치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미소 양국의 현실적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조선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도적 성향을 보인 사람들의 입지는 결코 넓지 않았다. 혼돈의 시대, 극단적인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온건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심산은 정치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정치적 야망이 없었기에 심산은 신탁통치 반대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향후 권력에 관심이 없는 심산은 미국이나 소련과 타협할 이유도 없었다. 당장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독립 국가를 이루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게 독립 운동가이자 조선의 선비 심산의 뜻이었다. 국민이 단결만 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정치적 야망 없는 원칙주의자

심산의 반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심산에게 정치적 야망이 없었던 것은 그를 격동의 시대에서 밀려나게 만들었다. 권력에의 야심이 없는 그에게서 적당한 타협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제 정세의 흐름 역시 그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권력에의 야망이 있었다면 심산은 어쩌면 미국과, 또 미국에 영합한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원칙주의자들의 손에 쥐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심산의 눈에 미소 양국에 기대는 일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일 뿐이었다. 그가 정당을 극도로 기피한 것은 권력욕이 나라를 분열과 혼란으로 몰아갈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탁통치 찬반 싸움 이후 남과 북이 갈라서는 과정에서 심산은 완고한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였다.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대의에서 벗어난 행동과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송진우와 백범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진 며칠 뒤인 1945년 12월 30일 고하 송진우가 자택에서 암살됐다. 한민당을 이끌던 송진우는 신탁통치에 대해 유연한 입장이었다. 대놓고 찬탁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놓고 송진우는 김구 등 임정 요인들과 견해 차이를 보였다. 김구에게 "임정이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며 미군정을 무조건 적대시하다가는 상대(좌익)에게 유리한 일만 할 것"이라고 한 송진우는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암살되기 얼마 전 송진우가 심산의 집을 찾았다. 정당 난립의 폐단과 시국을 걱정하며 머리를 맞댄 자리였다. 심산은 송진우를 마음속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3'1 운동으로 투옥된 이후 독립 운동의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송진우는 그 스스로 "태평시절이었다면 성리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듯 학문의 명성도 높았다.

시국 수습의 고견을 묻는 송진우에게 심산이 말했다. "국민들이 날이 갈수록 한민당을 공격하고 있다. 그대가 민중들의 공격 목표가 되면 장차 무슨 방책으로 이를 막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심산은 송진우의 거취에 대해 두 방안을 말했다. "당내의 친일분자들을 숙청하기 위하여 당의 해산을 선언하고 당을 개조하거나 아니면 당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하고 은거생활을 함으로써 위신을 기르는 둘 중에서 선택하라."

암살소식을 듣고 심산은 "일 할 만한 인물 하나를 잃었다"고 애석해했다.

임정 인사들이 주축이 된 한독당이 각 정당과 통합을 추진할 때였다. 백범이 심산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했다. 심산의 생각에 백범은 국내정세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심산이 말했다. "저 잘났다고 다투는 많은 정당들이 머리를 숙이고 선생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오려 하겠는가. 한민당은 이승만의 심복으로 군정과 결탁해서 형세를 확장하고 있으니 한독당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한민당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우남과의 사이만 벌어질 것이다. 나는 정당하자는 일은 찬동하지 못 하겠다."

해방 직후 심산은 당을 만든 친구들이 당수로 취임하라고 권했지만 당을 세워 서로 다투는 것은 나라의 전도에 화근이 될까 우려된다며 거부한 적이 있다. 정당을 같이하자는 제의는 상대가 백범일지라도 뿌리쳤다. 심산에게는 백범이나 이승만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향후의 권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민족의 단합과 통일정부 수립이 더 소중했다.

◆비상국민회의

1946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소집됐다. 독립운동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망라하여 회의를 구성, 정부를 수립할 방안을 토론키로 한 것이다. 민중지도자 8인이 특별위원으로 추대됐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조만식 홍명희와 심산이었다. 일반위원으로는 좌우익을 불문하고 사회 각계 대표 270여 명이 뽑혔다. 좌익이 불참한 가운데 2월 1일 첫 회의가 열렸다.

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정부를 수립할 모체기관부터 설치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최고정무위원 28인을 뽑아 그들에게 정부를 조직할 권한을 부여하자는 안이 통과됐다. 최고 정무위원은 최고 영도자로 추대된 이승만 김구 두 사람에게 일임토록 했다. 심산은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엉뚱한 소문이 돌았다. 최고정무위원은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기관이 아니라 미 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이 된다는 것이었다.

심산은 정인보에게 "사실이라면 이승만 김구 두 사람은 국민의 총의에 배신하고 하지에게 아부하는 죄인"이라고 했다.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다음날 신문들은 이승만 김구 두 사람이 하지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28인을 조직, 미 군정청에서 회의를 소집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이승만은 의장, 김규식이 부의장, 김구는 총리를 맡는다고 했다. 심산은 분노했다. 하지의 자문기관 운운은 비상국민회의에서 아예 나오지도 않았었다. 원칙주의자 심산과 해방된 조선의 권력을 잡으려는 이승만의 대립은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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