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반도의 가희'로 불린 김안라(상)

입력 2013-11-07 14:12:11

김정구 등 가족 전체가 음악인…소프라노 가수가 꿈

어떤 특정한 재주를 남다르게 지닌 가문이나 혈통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수 김안라(金安羅'1914∼1974)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김안라는 1914년 함경남도 원산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 중의 둘째로 출생했는데, 오빠는 초창기 가요계의 중진이었던 김용환(金龍煥'1909∼1949), 바로 밑의 아우는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金貞九'1916∼1998), 막내가 피아니스트 김정현(金貞賢'1920∼1987)이었지요. 여기에다 김안라의 올케언니, 즉 김용환의 아내는 가수 정재덕(鄭載德)이었으니 그야말로 온 식구가 음악가족이라 할 만했습니다.

김안라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성여학교를 다녔습니다. 1930년 1월 28일 아침, 김안라의 나이 16세 때 원산의 공사립학교 재학생들이 일제히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사건이 중외일보 기사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진성여학교 생도의 주모자가 바로 김안라였는데 필시 가수 김안라와 동일인물로 추정됩니다.

집안에서는 그해 4월, 안라를 일본 도쿄로 서둘러 유학 보냈습니다. 김안라는 일본에서 무사시노음악학교와 니폰음악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분위기가 가장 안정되어 있던 도쿄의 중앙음악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여기서는 성악과와 중등과를 다녔는데 재학 시절 유명 성악가이자 교수였던 히라이(平井美奈子) 선생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일도 했고, 또 무대에서 조선 유행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에 김안라의 활동 소문을 접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재빨리 취입 제의를 해왔고, 이때 '낙화'와 '월하(月下)의 유선(遊船)' 등 두 곡을 불러 음반으로 발매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932년, 음악학교 재학 시절에 나온 가수 김안라의 첫 데뷔앨범입니다. 비록 유행노래로 음반을 내긴 했지만 김안라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예술성과 대중성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으며, 장차 훌륭한 최고 소프라노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이 몰래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시에론음반이 장안의 화제가 되자 이번에는 폴리돌레코드사에서 취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폴리돌레코드사와는 전속계약을 맺었고 여기서는 1933년 3월부터 역시 시에론과 마찬가지로 8개월 동안 '청춘은 괴로워'를 비롯하여 '사랑의 옛터에서' '종로비가' 등 5곡을 발표합니다.

김안라는 폴리돌레코드사 전속가수 자격으로 1933년 8월 8일 도쿄 양악연구회가 주최한 한반도 북선(北鮮)지역 일대 순회공연에 이승학, 오우현, 이광엽 등과 참가하게 됩니다. 다닌 지역은 웅기, 회령, 청진, 나남, 명천 등지의 북관(北關)지역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34년 8월에는 한반도의 남쪽지역 일대에 막대한 태풍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도합 787명이 죽고, 침수 붕괴된 가옥이 3만4천380채나 되었습니다. 선박피해는 375척이었는데 그해 8월 19일부터 일본에서는 도쿄의 유일한 조선인 극단 삼일극장 주최로 경교공회당에서 남조선수해구제 구원공연이 열렸습니다. 김안라는 이 공연무대에 박경희, 신병균, 주성일 등과 함께 출연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9월 4일부터 양일간 도쿄의 본소공회당에서 열린 남조선수재민구제 동정 영화, 무용, 음악, 조선가요의 밤에도 출연해서 공연수익금을 모두 수재민 동포들에게 보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김안라는 오랜만에 고향 원산으로 잠시 다니러 왔습니다. 이때 오빠 김용환은 동생 안라와 정구, 정현, 아내 재덕과 함께 형제악단을 조직해서 동해안의 교회를 다니며 순회연주의 길을 떠났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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