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착한 회사원이 있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지나치다 마주치는 회사 근처 걸인에게 그는 매달 1만 원씩 적선을 했다. 그러나 경제가 나빠지고 주머니 사정도 어려워져 이듬해 5천 원으로, 그다음 해엔 3천 원으로 적선 금액을 줄였다. 그날도 3천 원을 적선하려고 지갑을 빼는데 걸인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돈이 왜 자꾸 줄어드는 거요?" "아이들이 자라서 공부시키느라고…." 당황해하는 회사원에게 걸인이 버럭 역정을 냈다. "그럼, 그동안 내 돈으로 당신 자식 공부시켰단 말이오?"
얼마 전 대구의 모 기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좌중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실화인지 유머인지 모르겠지만, 선의를 베푼 사람을 '호구'로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호구'(虎口)란 호랑이가 면전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뜻한다. 바둑 용어로는 상대편의 석 점이 입을 벌리고 있는 가운뎃점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호구는 어수룩한 나머지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우스갯소리를 들으면서 2010년 개봉한 한국 영화 '부당거래'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검사로 분한 류승범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날린다.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부당거래'는 학연 제일주의, 뇌물, 권력 비호 등 우리나라의 병폐에 돌직구를 던진다.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연쇄 살인범 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수사 도중 유력한 용의자가 죽어버리자 가짜 범인을 만들어 사건을 종결지으려 한다. 검사는 각본 수사를 하고, 경찰은 연출을 벌이며, 권력층에게 빌붙은 기업인은 연기를 한다. 영화 속에서 힘 있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권력의 보호를 받고 유유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해 놓고는 힘과 여론 조작을 동원해 이를 합리화시킨다.
17세기 프랑스의 우화 작가이자 시인인 라 퐁테느는 우화집 '늑대와 새끼 양'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이렇게 풍자했다. 새끼 양이 개울물을 마시고 있는데 늑대가 나타난다. 늑대는 새끼 양을 잡아먹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고 억지를 쓰지만 새끼 양은 하나하나 조리 있게 대답한다. 새끼 양이 승리한 듯 보인다. 그러나 말문이 막힌 늑대는 이유를 대지 않고 새끼 양을 잡아먹어 버리고 만다. 약자로서는 강자의 억지를 당해낼 도리가 없다는 슬픈 현실을 우화는 보여준다.
문제는 지도층'권력층의 비도덕이 계속되면 사회적으로 그게 규칙인 것처럼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합리적이고 양성화된 규칙 못지않게 지연, 학연, 혈연이 강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도층의 도덕적 불감증을 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이익을 챙기거나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다른 누군가를 호구로 삼으려는 세태가 번지고 있다.
'호구 문화'와 관련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광경이 있다. 병원 인근 슈퍼마켓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낮술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나이롱' 환자다. 자동차 접촉 사고에서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운전사가 병원에 드러누워 상대방 차주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요구한다. 평소 그는 "이 나라가 썩었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다. 정작 자신은 낮에 환자 행세를 하다가 밤이 되면 병원을 몰래 빠져나가 운전 일을 하러 다녔다.
위치와 처지가 상대적으로 바뀌는 현대사회에서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운전자도 차에서 내리는 순간 보행자가 된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전체의 큰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사람이 늘면서 세상살이는 점점 더 팍팍해지고 사회적 비용도 커지고 있다.
호구 신세가 되는 것은 유권자들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 했다. 그러나 선거라는 명분 아래 유권자가 호구가 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기반으로 27개 선거구 싹쓸이 현상이 빚어진 대구경북에서 지역민들이 정치적 호구로 비치는 것이 아닌지 되씹어볼 일이다. 지역민들이 몰표를 줬더니 정치인들은 '맡겨놓은 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유권자는 안중에 없고 권력 핵심부 눈치만 보는 정치인들 역시 어디 한둘인가. 호의가 계속되니 그것이 권리인 줄 아는 정치인들을 다음 선거 때부터는 반드시 걸러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