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행복편지] 마무리가 주는 미감

입력 2013-11-05 07:37:10

주말에 청송의 송소고택을 들렀습니다. 문화재와 마주하는 일은 늘 흥미로운 일입니다. 사람이든 건축물이든 그 숨은 이야기는 하나같이 감동의 원천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집주인 청송 심씨 종손의 안내로 아흔 아홉 칸의 큰 집을 요모조모 살핍니다. 130여 년 전에 지어진 수려한 가옥 구조는 물론 집채마다 따로 마련된 넉넉한 마당에서 호흡을 길게 해봅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가려주는 토담 벽에 뚫어놓은 여섯 개의 작은 구멍은 손님의 지위에 따라 접대의 규모를 정하려 한 아녀자들의 가늠자였겠지만 나는 거기다 해학까지 덧입히는 상상을 해봅니다.

한옥의 아름다움은 바깥으로 드러난 이음새와 끝단에서 만납니다. 용두머리 끝을 닫는 치미라든지 빠르게 흐르는 처마 끝을 마무리하는 망와는 집의 품위와 미를 돋보이게 합니다. 도리와 서까래의 하중을 이겨내기 위한 부재로 쓰이는 소로나 공포도 사실은 그 기능 이상으로 도편수의 솜씨를 엿보게 하는 것들입니다.

방을 아늑하게 만든 창호는 어떤가요. 두 문짝의 절묘한 틈새 그리고 그림을 그리듯이 조각한 문살은 고택 미의 절정을 이룹니다.

2년 전, 정년퇴직을 앞둔 나에게 박순자 명인이 골무가 헤지도록 한 뜸 한 뜸 정성을 들여 한복 한 벌을 지어주었습니다. 내 몸에 참 잘 어울리는 청회색 한복입니다. 손바느질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박 명인은 옷의 모양은 바느질 끝단에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베를 마름질하고 봉제하는 기술이 하나하나 모여서 옷의 선을 만들어주고 모양을 나게 하는데 그 정점이 동정이라 합니다. 동정의 이 맞추는 것이 곧 옷 짓기의 마무리라는 것이지요. 살 고운 목을 살짝 가려주는 하얀 동정의 양 깃이 서로 맞물려 콧등의 중심을 올려 받쳐주는 매무새가 되어야 잘 지어진 옷이라는 것입니다.

한동안 지인들은 나에게 교정을 떠나려니 아쉽지 않으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400m 계주에서 내 몫 100m를 즐겁고도 열심히 뛰었지 뭐…"라고 화답했지요.

더도 덜도 아닌 꼭 내 몫을 뛰고 내 뒷사람에게 배턴을 넘긴 거라고. 뛰는 역할을 끝낸 내가 기꺼이 돌아갈 곳은 관중석입니다. 트랙에서 제 몫을 다해 뛰는 선수를 격려하고 박수 쳐 줄 준비를 하면 되지요.

세상의 중심은 나 아닌 주자에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지난날 주자로서 트랙을 쫓던 나에게 비추던 그 빛나는 스포트라이트가 더 이상 내 몫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는 관객의 하나가 되어 내가 함께해온 장엄하고도 미려한 축제를 더불어 즐기면 됩니다. 계주의 끝자락이 그것 아닌가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한 시인의 시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네 삶 자체가 한 구간의 트랙 아니겠습니까. 영원의 터가 아니라 잠시 바람 쐬러 나온 곳이라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전제이겠지요. 시작할 때 마침을 전제한다면 내가 가진 것, 놀던 공간, 그리고 하는 일들을 모두 아름다움으로 마무리할 수가 있을 겁니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선덕대왕신종은 천 년의 명종입니다. 겉면에 조각된 비천상과 종의 유려한 곡선 그리고 설화 속의 주조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거기다 종두의 손을 떼고 난 뒤 은은한 울림이 있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잔잔하고도 길게 울리는 그 여운에 묻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속 깊이 진동이 일어납니다. 악기의 소리가 마무리되는 순간의 여음 때문입니다.

지난 2년간 '좋은생각 행복편지'의 한 트랙을 맡았던 저는 이제 그 여음을 안은 채 독자로 돌아가려 합니다. 달마다 편지를 전하면서 제 스스로 더욱 행복했음을 고백하며 독자석을 지키려 합니다.

어느새 동짓달입니다. 얇게 남은 달력을 바라보니 괜스레 맘이 시리고 아립니다. 낙엽이 짙게 내린 거리를 걸으며 섣달보다 더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합니다. 무상함에 순응하는 저 나무들처럼 매듭을 지으며 마무리 인사를 드립니다. 늘 행복하소서!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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