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필리핀 '레미콘 왕' 이다
"그래 바로 이거야! 레미콘! 필리핀 섬이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 한 수요는 존재할 것이고 경기가 어렵더라도 크게 문제될 게 없어. 1차 기간산업이잖아."
사내의 의욕은 충만했다. 사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머나먼 타국에서 땀 흘린 시간이 어언 7년.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공장 부지부터 마련했다. 운도 따라줬다. 때마침 한국에 부도난 건설사가 내놓은 레미콘 기계를 헐값에 사들여 설비도 어렵지 않게 갖췄다. 그런데 공장을 돌릴 수는 없었다. 레미콘을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몰랐다. 사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사업은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확신뿐이었다. 당시 필리핀에는 레미콘 업체가 서너 개에 불과했다. 믿고 도움을 청할 현지인도 한국인도 없었다. 그는 밤낮 레미콘 관련 서적에 파묻혀 살았다. 기술자 한 명 없이 홀로 샘플 만들기를 수백 차례 거듭했다. 그야말로 고군분투였다. 한국인 특유의 뚝심과 근성으로 밀어붙였다. 더군다나 10년 동안 건설사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아니었던가. 사내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 간판을 내건지 1년 만인 1993년 봄 첫 주문을 따냈다. 그 당시 건설현장으로 직접 레미콘 트럭을 몰고 나갔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60대 열혈남아 레미콘왕
필리핀 레미콘 업계 1위 회사인 '10K'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내는 바로 10K의 창업자 김근한 회장이다. 인구 1천300만 명의 필리핀 최대 도시 마닐라에서 10K는 현재 직원 200여 명, 연매출 8천만달러 규모에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탄탄한 기업으로 우뚝 섰다.
단순 명쾌한 사업구상을 이렇게 배짱과 열정으로 실현시킨 김 회장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열혈남아'였다. 그는 마치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거침없이 구사했다. 말투와 행동에는 호소력과 생기가 넘쳤고 이 나라 '레미콘 왕'다운 당당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얼굴은 소년처럼 밝고 온화한 홍안을 하고 있었다. 혈혈단신 이국땅에 정착해 이 나라 최대 레미콘 기업을 일궈낸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못할 역경을 겪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것이란 지레짐작은 빗나갔다. 그가 말한 성공과 젊음의 비결은 당당함과 솔직함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1960대 청년 김 회장이 풀어놓은 입담은 청춘찬가를 연상케 했다.
◆화려한 군 복무
그의 청춘찬가 1절은 군 복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 회장은 안동 농민고와 대구 청구대학을 졸업했다. 군 입대 영장을 받기 전까지는 토지개량조합(현 한국농어촌공사)에서 1년 반 동안 근무를 하고 있었다. 군 생활은 그의 체질에 맞았다. 안동 36사 훈련소에서부터 사격과 내무 생활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운 좋게도 육군본부 행정병으로 차출됐다. 안동 훈련소에서 서울 육본까지 택시를 대절해서 갈 정도로 그는 너무나 기뻤다. 육본 특검단에 배치된 그는 육본을 드나들던 중앙정보부 고위 간부 눈에 띄었다. 그 간부는 그에게 중정 근무를 제의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대했다. 제대를 하겠다는 그에게 중정 간부는 좋은 일자리를 선물했다. 그 간부의 전화 한통으로 그는 제대하자마자 남광토건에 입사를 하게 됐다.
◆레미콘업에 몸을 던지다
1977년 입사 3년 만에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그는 도로 공사 파트에서 관리 업무를 맡았다. 해외 근무도 군 복무 시절처럼 적성에 맞았다. 성격이 활달한 그는 현지인들과 잘 어울렸고 덕택에 영어를 빨리 습득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탁월한 언어 능력은 해외 근무에서 큰 자산이 됐다. 그는 현지인과의 의사소통 문제나 관공서와 관련된 민원을 곧잘 해결했다. 이어 인도네시아 현장으로 파견돼 1983년까지 근무를 하고 자기 사업을 위해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는 필리핀 현지인이 경영하는 건설회사에 취업했다. 철저히 현지화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에 그는 언어 실력과 친화력을 무기로 현지 업계 밑바닥부터 파고들었다. 현지인 회사를 다니면서 사업을 준비한 기간은 무려 7년. 그는 마닐라 시내에 레미콘 트럭을 다니게만 한다면 무조건 성공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레미콘 사업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1990년대 필리핀 경제는 정치 불안이 심화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멍이 들고 있었다. 도로, 항만, 빌딩 할 것 없이 건설 현장 대부분이 수년간 '스톱' 상태였다. 아무리 경기 영향을 덜 받는 업종이라 하더라도 사업이 잘 될 리 없었다. 형편이 안 돼 공부 잘하는 두 딸을 국제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세무조사까지 당해 1년 6개월간 공장이 폐쇄되기도 했다.
"공장 팔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지요. 처분할 때 하더라도 제대로 가동이나 해보자고 말이죠. 당시 영업 사원은 1명으로도 충분했지만 10명을 채용했습니다. 하루 한 명이 주문 물량을 가져오면 공장을 열흘 동안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는 이때까지도 실패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공격적인 경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2004년 아로요 대통령이 재선되고 정치가 안정되자 경제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조세 개혁 등 경제 개혁을 통해 필리핀 경제는 해마다 5%대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그의 공장도 이에 발맞춰 매년 매출이 20%나 증가했다. "공장이 하루아침에 일어서더군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줄곧 24시간 공장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업계 최고 수준의 직원 대우
김 회장이 역경을 극복하기까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공격적인 투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레미콘 트럭을 타고 직원과 함께 현장에 직접 나갔습니다. 거래처 사장이 놀라더군요. 절박함 속에서 그렇게 했지만 돌이켜보면 믿음과 신용이라는 큰 자산이 된 셈입니다." 그는 레미콘업을 구태의연한 제조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일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보다 강하다. "레미콘은 사회 기반 시설 구축에 반드시 필요한 건설 자재 아닙니까. 제가 이 나라 국가 기간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자부심은 직원들에 대한 처우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10K 노동자 모두가 정규직인데다 동종 업체보다 임금을 서너 배나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2005년 이후 회사를 떠나는 직원이 단 한 명도 없다.
◆한인회 개혁의 선구자
그는 회사만 보고 달리지 않았다. 필리핀 한인회장과 한인체육회장직을 맡아 동포들의 단합과 복지 향상을 위해 왕성한 봉사 활동을 펼쳤다. 그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도 사비까지 털어가며 고국의 전국체육대회 참가나 현지 한인 축제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2000년부터 2년간 한인회장직을 맡으면서 한인회의 이권 개입이나 비리 척결에 앞장서는 등 교민사회가 신뢰받는 커뮤니티로 자리 잡는 데 기틀을 다져놓았다. 또 세계 각국 한인회 가운데 최초로 한국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대사관 관련 업무를 대행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인회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 회장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경북도해외통상자문위원회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1년에 한 번 모여 박수치고 사진 찍는 일이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며 "위원들 가운데 의지가 있는 몇 명이라도 소수 정예화해서 구체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패기만만한 김 회장에게 10K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이랬다. "저는 이 나라 와서 누릴 것은 다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친척과 자식들에게도 해 줄 것은 다 해줬습니다. 앞으로 10년 공장 잘 유지해서 여기 직원들에게 물려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필리핀 사회에 환원한다 생각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가 남긴 청춘찬가의 마지막 구절은 소박하지만 의미가 깊어 보였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글'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