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들처럼 우리도 모여봐…단, '자랑질'은 금지
우리 사회에서 혈연'지연'학연은 사회적 친화를 확대하는 가장 핵심적인 매개체이다. '연고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개인과 가족을 넘어선 인간관계를 맺고 공동체적 신뢰를 강화한다. 2011년 개봉했던 영화 '써니'가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대박을 터트린 이유이기도 하다. 칠공주파 모임을 결성했던 여고생들이 중년에 다시 만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은 40, 50대 주부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영화의 영향 탓일까? 그룹 '보니엠'이 불렀던 같은 제목의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며 만나는 여고 동창회 모임이 최근 부쩍 늘었다. 올가을, 지친 일상을 잠시나마 벗어나 가장 빛나던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활발해지는 여고 동창회
이앵규 새누리당 대구시당 사무처장은 요즘 동창들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몇 해 전 결성한 대구 정화여고 동기 모임이다. 처음에는 서너 명에서 시작했지만 각자 새로운 친구들을 회원으로 추천하면서 10여 명으로 규모가 불어났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했다. 고교 3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었던 동창을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남이 몇 번 이어지면서 스스럼없이 대하게 됐다. 처음에는 서로 명함을 건네고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문을 열었지만 이제는 아주 오래된 친구들처럼 지낸다. 이 처장은 "같은 해에 같은 교문을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죽이 맞을 수밖에 없다"며 "고등학교 친구들은 이해타산을 따질 게 없어 무엇보다 좋다"고 했다.
신명여고를 졸업한 김득순 대구시교육청 학부모역량개발센터장은 얼마 전 동기회 회장을 맡아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대구지회의 경우 40명 정도에 불과한 참여 회원을 100명까지 늘린다는 게 목표다. 김 센터장은 이를 위해 등산'골프'무용 등 각자 취미를 살린 동아리를 활성화할 생각이다. 또 동문회지에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동문들이나 사회에서 명사 반열에 오른 동문도 자주 소개할 생각이다. 김 센터장은 "동기회라면 참여 인원이 우선 많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모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면서 남학생 동문까지 생겨 앞으로 더 힘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년 여성들이 고교 동창 모임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가정을 떠나 사회에서 처음 만나는 '인연'인 초등학교 친구들은 한두 번 만나면 반갑지만 '고딩' 친구들처럼 편하지는 않다는 게 공통적이다. 초교 동창들은 몇 가지 소싯적 추억이 전부인 경우가 많아 만나도 대화가 끊기기 마련이다. 반면, 고교 동창들은 서로 공유할 게 많다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눈빛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이인 셈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직장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잡고, 육아 부담도 줄어들면서 동창 모임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쟁사회에서 이익관계로 뭉친 직장 상사나 동료들로부터는 팍팍한 현실을 위로받기는 어렵다. 행복했던 과거를 함께 추억하며 스트레스와 고민을 날려버리기에는 옛 친구가 제격인 것이다.
◆동창'동문회 대하는 자세
흔히 여고 동문회는 남고 동문회만큼 잘 운영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하면 동문회 명부부터 찾을 정도로 남성들에게 학연은 거미줄처럼 얽힌 인적 네트워크의 기초이지만 여성들은 그럴 필요를 덜 느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물론 남성들의 경우도 직업에 따라 자주 갖는 모임과 사교 활동이 판이하다. 기업인들의 경우 정보 교류 성격의 모임이 많아 동창'동문'향우회 참석비율이 높은 편이다. 지역마다 특정 명문고가 '대세'를 이루고, 지역 안배를 통한 인사가 이뤄지다 보니 출신 지역과 고등학교를 따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경북 출신으로 이명박정부에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이모(54) 씨는 "사회활동을 하면서 여고 동문을 찾아볼 생각은 해봤지만 동문회 자체가 결성돼 있지 않았다"며 "기존 인적 네트워크 관리에도 적지 않은 신경을 써야 해 동문은 원래 친했던 일부와 만 연락하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대구여고를 졸업한 김윤옥 마음플러스행동연구소장은 이와 관련, "정말 사는 게 바빠서 동창회에 못 나갈 수도 있지만 여성들은 자신의 현실이 만족스러워야 동창 모임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며 "한마디로 자존심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학창 시절 자신보다 학업 성적이나 경제적 여유 등이 못했던 친구가 몇 십 년 만에 나타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이 달갑지 않게 보이기 마련이란 이야기였다. 동창회에 입고 나갈 의상 고르는 게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다.
2년째 김천여고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소민 씨는 그런 점에 착안, 모임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매번 나오는 친구들이 졸업생의 10% 정도인 40명 수준이다. 분기마다 한 번씩 모이는 이 동기회에서 '자랑 질'은 금기다. 남편의 수입, 아이들의 성적, 금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선 안 될 말이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여고 동창으로서만 이야기를 나누게 한 것이다. 위화감 조성을 막는다는 맥락에서 골프도 치지 않는다.
박 씨는 "처음에는 몇 명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많이 나오게 할까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며 "오랜만에 만나 '자식은 어느 학교 들어갔니?' '남편은 뭐하니?' 등의 질문을 받으면 스트레스만 쌓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또 "중년에 접어들어 마땅히 참여할 곳이 없던 친구들이 동창회에 나오면 무척 좋아한다"며 "서너 시간 수다를 떤 뒤 노래방에 가면 단합력이 최고가 된다"고 귀띔했다.
인생 후반부의 멘토(mentor)를 찾으러 동창회에 나간다는 이들도 꽤 있다. 경북여고를 나온 곽경숙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이사는 몇 해 전 대구 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을 지낼 때까지는 업무에 밀려 동문회에 거의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총동창회 임원들의 모임인 '백합회' 부회장을 맡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곽 이사는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모임에 나가면 젊은 편에 속한다"며 "선배님들이 높은 연세에도 활발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했다.
◆다양한 동문회 활동
7일은 2014학년도 대입 수능시험일이다. 고사장마다 각 학교 동문 선후배들의 열띤 응원전이 펼쳐지는 날이다. 여고 동문회도 마찬가지다. 커피나 초콜릿 등을 챙겨 이른 아침부터 고사장 앞에서 후배들의 '찍신 강림'을 기원한다.
여고 동문회의 활동은 남고 동문회 못지않게 열성적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영부인인 김옥숙 여사가 동문인 경북여고 총동창회는 지난해 4월 개교 86주년을 맞아 모교에서 역사관 개관식을 가졌다. 2009년부터 추진해온 역사관은 동문들의 성금 3억원으로 교내 강당 옆에 있는 총동창회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교복'교사(校舍) 변천사, 학교 연혁, 학창시절 상장'상패'트로피, 학교를 빛낸 동문 사진 등이 진열돼 있다.
홍옥교 역사관장은 "학창 시절 만들었던 자수 작품은 동문들로서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이라며 "총동창회에서 매년 1억2천만원 정도의 장학금도 후배들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신명여고(현재 신명고) 동문들로 구성된 'SM코러스 청라합창단'은 7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대구대합창제' 참가를 위해 맹연습 중이다. 신명여고는 영남지방 최초로 여성 합창단을 창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청라합창단은 그동안 재학생들의 개교 기념행사로 열린 음악회에 초청되기도 하고,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다양한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윤옥 여사의 모교인 대구여고 총동창회는 지난해 6월 옛 시립 대구여자고등학교 터였던 국채보상공원에 교훈을 새긴 표지석을 건립했다. 당시 동문들에게는 학창시절의 꿈과 낭만이 스며 있는 명소다. 대구여고는 1954년 6월 개교한 뒤 1980년 9월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전했다.
여고 동문회도 뭉치면 힘이 세다. 진주에서는 이 지역 여고 총동창회 회원들이 지난 8월 서울시의 등축제가 진주 남강 유등축제를 모방한 것이라며 축제 베끼기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일 열었다. 이들은 "여고 재학시절 개천예술제 때마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남강에 띄울 등을 만들고 소녀 시절의 소망을 담아 남강물에 내가 만든 등을 띄웠던 주인공들이기에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진주남강유등축제는 오로지 진주의 것임을 증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위 '뺑뺑이'로 고교에 입학한 평준화 세대의 낮은 참여도는 대부분의 학교 동창회가 안고 있는 숙제다. 그래서 역사가 오래된 명문 고교들의 경우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해 동질감이 큰 선배 세대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흔하다.
대구 한 고교 동창회 관계자는 "주도적으로 동문회를 이끌어 온 선배 세대들이 연로해지면서 모금 활동도 예전만 못하다"며 "후배들의 모교 사랑도 갈수록 약해져 고민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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