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수성못 연가

입력 2013-10-30 07:17:40

요즘 새롭게 호안(湖岸) 조경공사가 한창인 수성못은 우리가 젊었을 때는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던 시 외곽의 호젓한 유원지였다. 지금과 같은 세련된 멋은 없었지만 전원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 가을날 못 둑길을 걷노라면 수성들엔 황금색 들판이 물결을 이루었고, 들풀이 자란 못 둑 위로는 고추잠자리가 어지러이 맴을 돌았다. 보트장이 있던 남쪽으로는 제 키를 못 이겨 삐딱하게 자란 포플러들이 물 위로 긴 그림자를 담그고 서 있었다.

옛날의 수성못은 젊은이의 장소였다. 군데군데 연인들이 낚시꾼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연인과 같이 찾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성격 하나는 대책 없이 씩씩했던 나는 일단 얼굴 반반한 시내버스 안내양을 점찍어 어렵게 약속을 받아냈다. 수성못 둑길을 걸으며 프러포즈를 했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밥벌이의 괴로움을 일찍 알아버린 여자에게 문학이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뜬구름 같은 이야기나 늘어놓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운이 좋았는지 고기가 눈이 멀었는지 어느 날 어수룩한 낚시꾼에게 엄청 큰 대어가 걸려들었다. 그런데 그 고기가 낚시꾼을 그렇게 슬프게 하고 떠날 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낚지를 말 것을. 하지만 이미 상심(傷心)한 뒤에 없었던 일로 한다고 될 일이던가.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나무보트를 저었건만, 주고받던 밀어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손가락 걸던 약속은 밤하늘로 흩어졌다. 우리가 군대로 떠나서일까? 왜 젊은 날의 사랑은 다들 그렇게 끝나고 말았는지….

집이 수성못 근처에 있어 가끔 늦은 밤 수성못을 걸으며 상념에 젖는다. 운동을 하던 아줌마도, 팔짱을 낀 연인들도, 남은 날들을 권태롭게 메워가는 노인들마저 돌아간 텅 빈 수성못은 마치 향연 뒤에 몰려온 고독처럼이나 쓸쓸하기 짝이 없다. 건너편 못 둑길의 가로등도 곤한 불빛을 흘리며 힘겹게 서 있다. 벤치에는 침묵이 내려앉고 공원 길엔 스산한 바람이 스쳐간다. 밤이 깊어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수성못은 너무나 많은 이의 사연을 품어서일까?

거리에는 낙엽이 뒹굴고 라디오에는 연일 이문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제 또 한 해의 가을이 깊어가는 모양이다. 돌아보니 계절뿐 아니라 어느덧 내 인생도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것 같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아픈 사랑도 세월 가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삭혀지는 법이니 두려움 없이 사랑할 일이다. 화인(火印) 같은 옛 이야기 하나쯤 품고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좋은 계절에 추억할 사연 하나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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