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푸른 가을 하늘과 따스한 햇살, 오색 물감으로 붉게 물든 단풍, 가을이 무르익는 정점에 와있다. 이렇게 화창한 가을날에는 일상에서 벗어나 산과 들을 찾아 떠나고 싶다. 조금만 도시를 벗어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고 바쁜 도시의 일상생활 속 스트레스까지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교외로 가서 전통 민가나 민속마을, 고찰(古刹)을 찾게 되면 건축을 전공해서인지 건축물과 취락에 먼저 관심이 간다. 기회가 될 때마다 교외를 찾는 편인데, 어린 시절 느꼈던 일상의 여유로움과는 사뭇 다른 우리 전통건축에 배어 있는 자연의 이치와 건축적 교훈을 읽을 수 있어 색다른 감회를 느끼곤 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전통건축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그 지역의 풍토성이 반영된 건축 기술의 종합체이다. 눈에 보이는 전통건축물의 규모는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초라할 정도이고 주거 환경의 쾌적성과 편리함도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지만, 이들 건축물 요소요소에 반영된 자연의 이점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접목한 건축적 설계 기법(passive design)의 우수성과 적용 기술의 완성도는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건물의 북쪽에 산이 위치하거나 아니면 나무를 심어 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약화시켰고, 여름에는 숲에서 불어오는 맑고 시원한 공기가 건물로 유입될 수 있도록 남사면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적절한 처마 길이는 여름의 강렬한 일사를 차단하고 추운 겨울에는 적극 일사를 받아들여 실내 열 환경 형성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벽체와 지붕의 구성재는 반경 수㎞ 이내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흙, 나무, 돌, 볏짚 등을 활용함으로써 단열과 습도 조절, 쾌적 실내 공기 환경 형성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도 잘 조화를 이뤘다. 재료 운반 과정의 에너지 소비도 불필요하여 재료의 내재에너지 경감에도 크게 기여했다. 건물의 장변을 동서 방향으로 길게 배치하여 다수의 남향실을 생성하고 통풍, 환기에 있어서도 많은 장점을 살릴 수 있게 계획되었다. 건물을 철거할 경우에도 건축 폐기물은 풍화되어 오염의 흔적 없이 원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한 물질의 순환 특성도 함께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통건축은 자연환경과 조화되며 자원과 에너지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하여 건강한 주거 환경을 제공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통건축은 오늘날 녹색건축의 개념적 바탕이 되는 것이다. 자연자원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소비하며 그 부산물로 환경오염 물질을 발생시키는 건축이 기존 건축이라 한다면, 전통건축은 건축이 자연생태계의 일부로서 환경오염 없이 자연자원과 에너지를 활용하고, 자연의 순환 체계 속에서 상호 간에 유기적인 연계를 갖고 전체 시스템의 구성 요소가 되는 건축인 것이다.
과거 인간이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산업화 이전까지는 그 지역의 환경 특성과 풍토 특성을 살린 철저히 자연에 순응한 건축만이 받아들여졌고, 환경적으로도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인간의 삶의 질 향상과 쾌적성 추구를 내세워 화석에너지 공급이 전제된 설비적 설계 수법(active design)으로 건축의 방향이 전환되면서 우리는 심각한 환경 문제와 많은 부작용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건축계에 강하게 일고 있는 녹색건축 바람은 시기적절하다. 더 이상의 방관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전통건축에 접목된 자연의 이점을 살린 건축적 설계 기법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접목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현대건축의 쾌적성과 편리성, 기능성들은 그대로 계승 발전하고 자연과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많은 가치들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지금 당장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면 손쉽게 적용 가능한 수법들부터 먼저 적용하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건축이 그 시대 인간의 삶과 환경, 사회적 요구들을 반영한 형태로 발전해 왔듯이, 앞으로도 새로이 제기되는 시대적 요구들을 적극 반영하며 계속 진화, 발전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최동호/대구가톨릭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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