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에 가서 애들이 모이면 '너 이거 해봤나' '나 그것도 해봤다' 식으로 허세 부리기 바빴다. 음악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내가 빠지면 섭섭했다. '재즈에서 세 명의 천재가 있거든. 찰리 파커, 루이 암스트롱, 마일스 데이비스' 나는 늘 이렇게 아는 척했다. 하지만 내가 약한 부분이 있었다. 기계였다. 친구 하나가 내 기를 꺾었다. "윤규홍 너 테이프 많이 모았지? 그거 철가루라서 30년쯤 지나면 소리 다 지워져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질걸." 나는 낙담했다. 그 녀석은 예언자도, 과학자도, 무엇보다 30년을 살아본 어른도 아니었지만 그 말은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사실이었다.
30년이 흘렀고, 그 말의 진위를 판가름할 때가 왔다. 30년 전 내가 닳도록 들었던 테이프가 집에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Let's Dance'다. 그래서 들어봤다. 아무 이상 없었다. 정작 해결할 문제는 듣기 전에 존재했다. 내게는 테이프로 된 음악을 들을만한 기계가 없었다. 오디오 세트를 조합하며 적잖은 돈을 들여 산 고급 외제 테이프 데크는 고장 났고, 새 자동차 오디오에는 테이프를 끼울 곳이 빠져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괜한 바람이 불어서 나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하나 샀다. 데이비드 보위를 듣고서는, 브루크너 교향곡을 들었고, 예전에 녹음했던 정은임의 FM영화음악도 들었다.
아날로그 필름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1980년대에는 한 해 우리나라에서 오천만 개의 음악 테이프가 판매되었지만, 지금은 만 개도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때 소니사가 만든 휴대용 '워크맨'은 언제 어디서나 남의 간섭을 피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혁신이었다. 그때 누구나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음악을 테이프에 담아서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후에도 어머니는 노래방에서 카세트에 담아 녹음한 외할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과거를 기록하던 카세트 자체가 이젠 과거의 물건이 되었다.
지적재산권 개념이 생긴 1990년대에는 어떤 문화 집적물이라도 마음대로 담을 수 있는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 플레이어 가격에 저작권료를 함께 부과하겠다는 법이 나올 뻔했다. 그것이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은 CD가 보급된 까닭이었다. 새로운 기술 문화는 과거의 영욕을 모두 덮어 버렸다. 이제 어정쩡한 과거가 된 올드미디어는 일부의 취미로만 존재한다. 엘피음반이 그렇다. 테이프도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 주변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정말 귀해진 다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 집에 있는 카세트 플레이어나 테이프를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면 분명히 좋은 뭔가를 경험할지 모르겠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klaatu84@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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