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엔 의학교·의학전문학교 승격
1923년 9월 1일 사립 대구의학강습소가 도립대구의원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대구자혜의원 의관인 요시다 쥰이치로가 의학강습소 설립을 청원해 그해 7월 23일 경상북도지사가 인가한 것. 당시 평양을 본따 경북도 도립 의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싶었지만 재정이 여의치 않아 월 수업료 3원의 사립학교로 문을 열었다. 초대 소장은 요시다 쥰이치로, 2대 소장은 도립대구자혜의원 원장이던 가미무라 나오치카가 맡았다. 1927년 7월 9일에 의학강습소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1929년 5월 1일 전임교수체제를 갖추고, 교과과정도 대폭 강화됐다. 이로써 전문의학교의 형태를 갖췄고, 학교 명칭은 경상북도립대구의학강습소로 바뀌었다. 1930년 3월 19일 조선총독부 고시에 따라 의학교로 승격됐다. 이는 별도 자격시험 없이 졸업과 동시에 조선에 국한된 의사 자격을 갖게 된 것. 1930년 3월 21일 의학교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조선뿐 아니라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의사 자격을 가지려면 의학전문학교 승격이 필수였다. 학생과 시민, 교수 등을 중심으로 의전승격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1931년 11월 해부학실습실과 임상강당 등을 새로 지었고, 대구 역사상 최초의 학술대회도 개최했다. 의전 승격의 전제 조건이던 학교 설비 충원을 위해 대시민 모금을 통해 이를 이뤄냈다. 이런 갖은 노력 끝에 1933년 3월 8일 도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고, 3월 25일 의학전문학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게 됐다.
1939년 발행된 대구의학전문학교 개요에 따르면 교수 39명, 재학생 287명, 졸업생 391명, 연간 실습비 1만6천330엔, 연간 저널 구입비 1천430엔를 확보한 명실상부 의학 고등교육기관이 됐다. 1940년부터는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여 학칙 1조의 목적을 '황국신민의 양성'으로 개정하는 비극도 있었다. 1945년 일본 패전에 따라 학교는 주한미군정청에서 관리하게 됐고, 1923년 이래 일본정부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돼 온 대구의학전문학교는 폐교됐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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