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한글의 기원을 파스파 문자에 두고 있다는 설을 소개하자, 어떤 분이 그렇게 본다면 한글의 가치를 깎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 왔다. 이에 대한 답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갈릴레이의 연구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뉴턴의 업적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같다. 더구나 한글은 뉴턴과 달리 그 뒤에 더 나은 문자가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올 가능성도 지금으로서는 매우 적다는 점에서 인류적인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온 세계의 문자들을 보면 가장 기초적인 것은 상형 문자를 개량한 표의문자들이다. 표의문자의 가장 대표적인 한자는 뜻만큼 많은 글자가 필요하고, '철수(도/만/조차) 먹었(다/지/을까)'처럼 조사와 어미에 의해 의미가 달라지는 우리말과 같은 경우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표의문자가 불편하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소리를 이용하는 문자들은 고안했는데, 소리를 이용하는 문자들은 대부분 음절 단위로 문자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나 중세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한자의 음을 이용해 이를 개량하여 썼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일본어가 가장 대표적이다. 우리말에서 사용하는 음절의 개수는 3천360개(초성 19개, 중성 21개, 종성 7개에 초성, 종성이 없는 경우 포함)이니까 만약 한글을 일본어처럼 만들었다면 한자만큼이나 많은 문자를 만들었어야 할 것이다.
문자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인 방법은 음절의 자음과 모음을 분리해 만든 음운 문자이다. 로마자의 경우 자음과 모음을 나누어 26개의 글자로 소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소리에 대응되는 문자가 없는 경우가 많고, 음절 단위로 파악되지 않아서 어디까지 끊어 읽어야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고, 글자의 체계가 없다.
한글은 음운 문자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음절 단위로 모아쓰기를 하기 때문에 음절 문자가 가진 장점까지 함께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자음의 경우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한 기본자 'ㄱ, ㄴ, ㅁ, ㅅ, ㅇ'에 같은 계열의 소리는 획 하나를 더하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며, 모음의 경우 천지인(·, ㅡ, ㅣ)에 해당하는 글자의 조합으로 모든 모음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적용해 보면 한글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기본적인 8글자에 기본자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ㄹ'을 포함하여 9개의 자판만 있어도 충분히 입력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핸드폰의 12개의 자판만으로 쉽게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인터넷 검색을 하고, 동호회에 글을 올리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한자나 일본어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고 빠르게 이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문맹률이 훨씬 더 높았을 수도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한자만으로도 문자 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반대 상소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나라가 현재와 같은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700년 앞을 내다본 세종대왕의 지혜가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느껴진다.
능인고 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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