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의 인문학, 음악을 말하다] 술리코, 잔혹한 통치자의 미의식

입력 2013-10-12 07:42:41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트빌리시는 5세기에 형성된 고도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트빌리시는 5세기에 형성된 고도다.

내 사랑하는 그대 무덤을 찾아왔으나/ 어딘지 알 수 없구나! 정녕 잃어버린 건가!/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술리코는 어디 있을까?// 가시덤불 속에서 장미를 보았다/ 홀로 외롭게 핀 꽃송이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물어보았다/ 네가 술리코 아니니?// 숨죽인 나이팅게일이/ 나뭇잎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달콤한 목소리로 새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술리코 아니니?

술리코는 조지아(그루지아) 민요이다. 조지아는 한때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었으나 1991년 탈퇴하여 독립국가를 만들었다. 언젠가 붉은 군대합창단이 러시아어로 부르는 술리코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던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노래는 19세기 조지아의 국민시인 Akaki Tsereteli(아카키 쩨레텔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죽은 연인의 무덤에 찾아와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호소하는 곡이다. 한데 이 노래가 스탈린의 애창곡이라니. 잔혹한 통치로 악명 높은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으로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폭군이었다. 그가 11세 때 아버지는 싸움을 하다가 칼에 찔려 죽는다. 이후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혁명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스탈린의 이미지는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정치로 요약할 수 있다. 스탈린(강철의 인간)이라는 이름은 레닌을 만나 얻었다. 그는 이름대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며 잔인하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체포와 처벌, 시베리아 유배를 일곱 차례나 경험했으며, 레닌의 신임을 얻은 뒤로는 주변의 공화국들을 소련 연방에 통합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 심지어 고향인 조지아를 침략하는 데도 앞장섰다.

스탈린은 집권한 뒤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적과 라이벌, 고위 장교, 소수민족 지도자들, 심지어 일반 인민들까지 수백만 명 이상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급격한 농업체제 개편으로 1천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으며 3천만 명 이상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그는 자신도 소수민족 출신이면서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도 화물칸에 강제로 태워져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지식인들이 총살당하고 인구의 절반가량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으며 죽은 시체는 열차 밖으로 마구 내던져졌다. 스탈린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냉정했다. 그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아들이 독일군 포로가 되었을 때도 방조했다.

폭력은 불안을 벗어나려는 충동이며 분노와 증오의 표출이다. 스탈린의 잔인성은 도착증적 파시즘이라 할 만한 것으로 그는 폭력을 통해 오르가슴에 가까운 희열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것은 유년시절부터 오래도록 억압되어 온 무의식이 표출한 것으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그를 몰고 갔다.

그런 그가 회식자리가 열릴 때마다 동향인 부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이토록 슬픈 노래를 열창했다는 사실은 믿기지 않는다. 스탈린은 일찍이 학생시절에 합창단 최고의 목소리로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마다 청중을 감동시켰다. 사실 스탈린이나 히틀러처럼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살인마들이 예술 애호가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본질은 선이 아니라 악에 있으며 증오나 파괴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아이러니는 이러한 증오나 파괴, 악이 없이는 선과 사랑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잔혹한 판타지를 현실 속에서 실현시킨 스탈린은 술리코처럼 초월적이고 아름다운 대상을 불러내 죽음과 삶이 상호보완적인 신성한 제의의 세계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속죄의 제의가 누군가를 죽이는 살해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듯이 그는 수많은 자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그의 제국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서영처 시인'영남대 교책객원교수 munji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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