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스페인 내전의 상처

입력 2013-10-03 11:04:57

스페인 내전 중 프랑코의 언론 담당관은 "스페인 남성의 3분의 1을 제거해서라도 스페인에서 볼셰비즘이라는 바이러스를 근절해야 한다"고 했다. 내전이 끝난 후 공화파에 대한 프랑코의 보복은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줬다. 스페인 내 50개 주 가운데 조사가 이뤄진 25개 주에서만 공식 처형자가 3만 5천 명에 달했다. 여기에다 내전 중 즉결 처형과 굶어 죽거나 감옥에서 병사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프랑코는 이를 '정화'(淨化)라고 했는데 일부 옥리(獄吏)에겐 가학(苛虐) 취미를 발산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들은 감옥 복도에서 처형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호세'(jose)나 '후안'(juan) 등 평범한 이름은 호명(呼名) 뒤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허옇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옥리들은 그것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성(姓)을 불렀다. 한 여자 감옥에서는 간수로 있었던 수녀가 그렇게 하기도 했다.

공화파의 '적색테러'도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내전이 발발한 1936년 여름에 가톨릭 주교 13명, 교구 사제 4천184명, 수도교단 사제 2천365명, 수녀 283명을 포함해 내전 동안 공화파에게 죽은 사람은 3만 8천 명에 이른다. 이 중 상당수가 즉결 처형됐으며 일부는 재판을 받았으나 조작인 경우가 많았다. 그 방식 중 하나는 신속한 유죄 선고를 위해 극우 정당인 팔랑헤당 당원증을 위조해 엉뚱한 사람을 당원으로 둔갑시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상호 증오에 비춰 공화파가 내전에서 이겼다면 공화파에게 보복 살해된 사람도 프랑코파의 정화 못지않게 많았을 것이란 추측은 충분히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이기에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소모적 역사 논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스페인이 프랑코 사망 2년 뒤인 1977년 여야 합의로 '망각 협정'으로 불리는 사면법을 제정해 '모든 것을 잊자'고 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산하 '강제'의문 실종에 관한 실무 그룹'이 스페인 정부에 강도 높은 과거사 청산을 촉구하고 나섰다. 스페인 정부가 내전과 프랑코 독재 기간 중의 실종자 문제에 소극적이라며 사면법을 폐기하라는 것이다. 정의의 차원에서 마땅한 요구지만 좌파와 우파 간의 구원(舊怨)을 재점화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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