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디 청산의 학이다
'나는 본디 청산의 학이다'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1544~1610년)으로 조선 중기의 고승이자 승장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존경의 뜻으로 사명대사로 부른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나는 본디 청산학이어서/ 항상 오색구름 위에 놀았는데/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져서/ 야계(꿩)들이 노는 데로 잘못 떨어졌다!'라고 번역된다.
위 시는 임진왜란 후 사명대사와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눈 문답 시로 충남 보령 개화예술공원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도쿠가와가 '돌 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石上難生草)/ 방 안에는 구름이 일기 어렵네(房中難起雲)/ 너는 어느 산의 새이기에(汝爾何山鳥)/ 봉황이 노는 데 왔느냐?(來參鳳凰群)'고 묻자 이처럼 답했다. 일본 장수의 조롱에 상대를 꿩 새끼로 비유한 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후 1604년 선조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강화사로 건너가 1605년 당시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상을 하기 위해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처음 만났다. 이 시로 인하여 포로 3천500명과 약탈해간 문화재를 환수하여 돌아오고 향후 250여 년간 평화수교협약을 맺었다. 탁월한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선조는 영의정에 제수했으나 3일 만에 사임했던 일화는 지금도 '삼일 정승'으로 남아있다. 화자는 본래 청산의 학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져 잘못 떨어졌음을 빗대고 있다. 간담이 서늘함을 느낀다.
지루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 안팎은 전쟁 후유증 치료에 정신이 없었다. 일본은 수차례 사신을 보낼 것을 요청해왔다. 조정에서는 사명대사를 천거하여 보냈다.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난 사명당과 문답(問答)하는 시문이다. 물음도 소름 끼쳤지만, 시인의 대답은 더 명쾌했다. '너는 봉황이 노니는 이곳에 왜 왔느냐?'는 질문에 '나는 본디 청산의 학이었는데 잘못 떨어져 여기에 왔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나는 본디 청산학으로 오색구름 위에 놀았다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지는 바람에
야계(野鷄)가 들끓는 곳에 잘못 떨어져 왔구나.
我本靑山鶴 常有五色雲
아본청산학 상유오색운
一朝雲霧盡 誤落野鷄群
일조운무진 오락야계군
【한자와 어구】
我本: 나는 근본이 ~이었다/ 靑山鶴: 청산의 학/ 常有: 항상 ~이 있다/ 五色雲: 오색의 구름/ 一朝: 하루아침에, 곧 일시에/ 雲霧: 구름과 안개/ 盡: 다하다, 사라지다/ 誤: 잘못하여서/ 落: 떨어지다/ 野鷄群: 야계의 무리들, 곧 꿩의 무리들이 노니는 곳.
사명대사의 속성은 임(任),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의 신묵(信默)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1561년(명종 16)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 8)에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휴정(休靜'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다니며 도를 닦다가, 상동암에서 소나기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를 보고는 무상을 느껴 문도들을 해산하고, 홀로 참선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웠다. 선조가 승하한 뒤 해인사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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