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불임수술에 숨어살던 나환자, 가톨릭이 보듬었다
나병(한센병)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다. 1873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헨리크 한센이 나균을 발견한 이래 1941년 치료제가 발명되고, 의술의 발전으로 완치가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나환자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정 지역에 강제 수용돼 불임수술과 강제노역을 강요당하는 등 극심한 인권 유린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으로 혼란할 때 강제수용시설을 벗어나 거리를 떠돌았고, 곳곳에 숨어 생활하던 나환자들도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가톨릭 교회에서도 구라사업, 즉 나환자 구제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수용시설을 지어 이들의 자활을 돕는 한편 조기검진과 치료를 위한 병원을 지었다.
◆가톨릭피부과의원 통해 나환자 도와
1950~1960년대 가톨릭 대구교구는 나환자들을 위해 교구에 구라사업부, 즉 나환자(한센병환자) 구제하는 사업부를 만들고,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아 의성군 다인면에 은양원, 고령군 우곡면에 신락원 등 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어 생계를 지원하며 치료사업을 진행했다. 1961년 4월 24일 오스트리아 잘츠브르크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엠마 프라이싱거가 한국에 왔고, 은양원에 머물며 나환자 치료와 나병에 대한 인식 전환, 정착촌 자립에 힘을 쏟았다.
이런 중에 가톨릭피부과의원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지원으로 1963년 2월 북구 읍내동에 병실 3개 동, 기숙사 1개 동으로 개원했다. 초기 나환자 병원은 전문 치료보다는 나환자 보호를 위한 수용시설에 가까웠다.
1966년 3월 가톨릭피부과의원 본관이 세워지고 엠마 프라이싱거가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나환자 조기 발견을 위해 이동검진과 외래진료에 나섰다. 장기 입원환자는 경남 산청병원으로 옮기고, 단기 입원실로 바꿔 많은 나환자가 치료 혜택을 받았다. 일반 외래환자도 진료하며 나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활동으로 나병 퇴치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
가톨릭피부과의원은 1981년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부속 가톨릭피부과의원'으로 바뀌었다가 1996년 '대구구천주교유지재단 가톨릭피부과의원'으로 개칭됐다. 1997년 8월 23일 한센인과 장애인 재활센터 건립을 목적으로 사회복지법인 엠마재단이 설립허가를 받고, 2000년 1월 24일 엠마재단을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에 흡수합병토록 결정됐다.
◆치료와 함께 자활 정착 이끌어
1952년 왜관에 정착하게 된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은 창립 초기부터 나환자 정착사업에 힘을 쏟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원조에 힘입어 왜관 삼청동에 '베다니아원' 농장을 인수받아 진료소를 세우고, 주택 200여 동을 지어 가구당 660㎡씩 농토 16만5천여㎡을 나눠주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어 1957년 칠곡농장 '애생원'을 인수해 양계사업을 통해 나환자와 가족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고, 1958년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에 '성심원'을 세워 나환자 정착사업을 계속했다. 아울러 1959년 상주군 공검면에 '성모성심원'을 세우기도 했다. 이들 정착촌에는 나환자 500여 명이 터전을 잡게 됐다.
성주 용봉리에 진료센터인 '성심의원'을 세워 1962년 3월 1일 개원했다. 초대 원장으로 대구파티마병원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하던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가 부임했다. 한편 성심의원은 1983년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이 운영권을 대구대교구로 이관함에 따라 가톨릭병원 성주 분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5년 문을 닫게 됐다. 그러다가 2007년 10월 마을 주민의 도움과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협조로 기존 병원 건물을 고쳐서 한센인들의 양로원인 '디에모의 집'으로 새 출발 했다.
메리놀회 조셉 스위니 신부는 1954년 입국해 한국에서 천주교 구라회를 창립하고, 전국 나환자를 대상으로 이동진료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포항 송정에서 예수성심시녀회를 창립해 구호활동을 펼치던 델랑드 신부에게 수녀들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에 따라 1955년 12월 20일 예수성심시녀회 수녀 2명이 파견돼 구라활동이 이뤄졌다.
1957년 5월 예수성심시녀회는 포항 송정에 '다미엔 피부진료소'를 열어 치료활동을 하고, 매달 한 차례씩 충남, 경남, 전남까지 이동진료를 다녔다. 1958년 포항 형산강 부근에 '베타니아 마을'을 만들어 구걸하며 떠도는 나환자들을 위한 정착촌을 만들었고, 울릉도에까지 이동진료를 다녔다. 한편 프란치스코회는 1959년 6월 종교적 갈등으로 나환자 집단시설에서 추방된 뒤 떠도는 천주교 신자인 나환자 60여 명을 위해 경남 산청군 내리에 자활촌인 '성심원'을 세우기도 했다.
◆나환자 전문 진료의원 만들어
파티마의원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 디오메데스 수녀는 왜관과 성주 용봉 등으로 나환자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1961년 3월부터 디오메데스 수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왜관 삼청동에서 호노라도 신부가 돌보는 나환자를 찾았고, 에나타 수녀와 간호사 한 명은 성주 본당 엑벨트 신부가 성주 용봉에서 운영하던 나환자촌을 찾았다. 이런 과정에서 두 수녀는 성주 용봉에 정착촌을 짓고 치료 의원을 만드는 꿈을 꾸게 됐다. 당시 용봉에 만 환자가 135명이 있었고, 신자는 90명이었다.
마침내 이들의 꿈이 이뤄져 작은 의원을 새로 지을 수 있게 됐다. 독일 미세레올재단과 독일 한센병협회, 미국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1962년 3월 1일 용봉 성심의원을 개설한 것. 약 3천700㎡ 부지에 연건평 약 450㎡ 규모의 성심의원에는 내과'외과'산부인과'피부과 등의 진료시설을 갖췄다. 이후 파티마병원의 김화선(베로니카) 간호사가 파견근무를 했고, 디오메데스 수녀는 매월 첫째'셋째 수요일에 왜관 삼청동에서, 넷째 수요일에는 성주 용봉에 가서 환자를 돌봤다.
성심의원은 1965년 영국 한센병조합에서 X-선 기기를 받으면서 한센병균이 뼛속까지 침투한 환자들도 치료할 수 있게 됐다. 1967년 정부가 양성환자들을 모두 국립병원으로 보내게 되자 성심의원은 음성 환자만 치료하게 됐다. 당시 한센병 환자 수는 63가구 200여 명이었다. 남아있는 음성 환자들은 양계, 누에, 양돈, 농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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