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관 하며 문화상…손자까지 3대가 같은 길
이 씨는 아들 이유종 교수와 함께 1990년에 대구 최초로 인물을 주제로 한 '인상 사진전'을 열었다. 평생을 사진에 헌신하면서 전국 사진관 중 유일하게 사진 문화상을 두 번(대한사진문화상과 현대사진문화상)이나 받았다. 물리학을 전공했던 이유종 교수는 "사진이라면 대구에서 2등 하기 싫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마음을 알고 난 후 가업을 잇기로 결심,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손자 승현 씨도 가업을 잇기 위해 사진학을 공부하고 있다.
◆기술을 배워야 산다
"먹고살기 위해 배운 사진기술, 이제는 우리 가족의 전부가 됐습니다." 이기철 씨는 충남 논산이 고향이다. 8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돼 큰누나 집에 얹혀살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논산에서 손수레 좌판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형(당시 22세)을 따라다녔다. 일찌감치 사회생활에 적응한 형님은 "오직 기술을 배워야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그 당시 기술이라고는 양복맞춤, 시계수리, 이발, 사진뿐이었다"고 회상한다.
형님 친구가 일하고 있는 논산 '박애사진관'에 들어가 사진기술을 배웠다. 청소부터 시작해 인물'가족사진의 '수정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험난했다. 3년 후 서울로 진출, 사진관에 취업했다. 어느 날 논산의 형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조카 정애가 많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삼촌을 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논산으로 달려갔다. 사흘 동안 아픈 조카를 돌보는 사이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조카가 나를 살린 셈이지요. 아마 그때 서울에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성로 예림사진관 창업
서울행은 좌절됐다. 대구에서 피란민 생활을 하면서 육군본부 사진반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현역 입영 영장이 나왔다. 군대 가기 싫어 '명성사진관'에 취업해 수정사로 일했다. 1954년 대구 동성로 중앙파출소 앞에서 개업했다. 비가 새는 양철지붕 건물에서 사글세로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됐다. 그 당시 사진사는 인기가 좋았다. 이 씨는 "아내도 그때 여고생이었는데 단골로 드나들면서 인연이 됐지" 라며 웃는다. 일거리가 밀려 새벽 2, 3시까지 일했다. 돈이 생기는 대로 새로운 사진기계를 샀다. "그때 부동산에 눈을 떴다면, 아마 지금쯤 거부가 돼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월당에 있던 현대예식장과 대봉동 경북고 옆 제일예식장의 사진부까지 운영하는 등 사업이 번창했다. 이후 대봉동에 들어선 대백프라자점 안으로 사진관을 옮겼다. 삼덕동과 범물동 등 3곳에 사진관을 운영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지만, 한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대백프라자 근처 초가집을 사 두었다. 마침내 2006년 대백프라자 맞은편에 6층 건물을 지어 대봉동 예림사진관 시대를 열었다.
◆가업 잇기
이 씨는 이제 사진관 운영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며느리 양정혜 씨가 사진관 운영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 씨는 거의 매일 출근한다. 예림사진관은 가족사진 전문 사진관은 물론 웨딩토털숍으로 발전했다. 양 씨는 대백프라자 옆에 최재훈웨딩숍과 예림사진관 웨딩토털숍까지 함께 운영하고 있다. 6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림사진관은 대를 잇는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 도움되는 일들을 하고 싶어한다. 이유종 교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노인을 대상으로 무료 장수사진을 찍어주는 봉사를 수년째 계속하고 있다. 2007년엔 대구경북지역 다문화가정 50여 가구를 대상으로 가족사진을 선물했다. 이 씨는 "많은 고객의 사랑으로 인해 지금의 예림사진관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대구경북 주민을 위해 나누고 베풀며 살고 싶다"고 한다.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검찰, '尹 부부 사저' 아크로비스타 압수수색…'건진법사' 의혹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