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⑥2차 유림단 사건과 나석주 의거

입력 2013-09-21 08:00:00

모금활동 발각 후 경북서 유림 검거 열풍…전국 600명 희생

재중 조선무정부주의 연맹을 결성하고 김창숙(앞줄 왼쪽)이 이회영 (앞줄 오른쪽)등과 함께한 모습. 성균관대학교 제공
재중 조선무정부주의 연맹을 결성하고 김창숙(앞줄 왼쪽)이 이회영 (앞줄 오른쪽)등과 함께한 모습. 성균관대학교 제공
1963년 5월 10일 서울 수유리 심산 묘소에서 열린 심산 김창숙 선생 묘비 개막식. 성균관대학교 제공
1963년 5월 10일 서울 수유리 심산 묘소에서 열린 심산 김창숙 선생 묘비 개막식. 성균관대학교 제공

◆2차 유림단 사건

고국에 몰래 들어와 8개월여 고생 끝에 심산이 모금한 돈은 독립기지 건설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초 계획은 20만원(당시 1원의 가치는 지금 돈으로 치면 1만원 내외)이었지만 냉담해진 조국의 부호들이 내 놓은 돈은 경비를 제하고 고작 몇 천원에 불과했다. 동지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다시 압록강을 건넌 심산의 마음은 당연히 편치 않았지만 귀로 또한 그에게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안겨줬다. 중국 군벌들의 내전으로 가는 곳마다 교통이 두절되고 잠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풍옥상과 장작림의 군대가 맞붙은 전장터를 여행하는 일반인은 아예 없었다. 황고둔, 산해관, 진황도와 당산, 천진을 거쳐 가까스로 상해로 돌아간 심산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심산이 고생 끝에 상해에 돌아간 지 한 달도 안 돼 국내에서는 유림에 대한 검거 열풍이 불었다. 심산의 모금활동이 발각되면서 시작된 이른바 2차 유림단 사건이었다.

유림의 검거는 경북지역에서 시작됐다. 심산이 본격적으로 모금에 나선 곳이 경북을 위시한 영남이었기 때문이다. 봉화 안동 성주를 비롯한 경북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된 검거 선풍에 희생된 유림의 숫자가 600명에 이르렀다. 경상북도 경찰부가 경북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사건을 시작했다 하여 2차 유림단 사건은 흔히 경북유림단 사건으로도 불린다. 주민들이 논밭을 잡히고 소를 팔아 성금을 기탁했던 봉화 해저리 바래미 마을에서는 이 사건으로 8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감옥까지는 가지 않았더라도 일경에 붙잡혀 매 타작과 고문에 시달린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등 신문을 보면 사건 관련자들과 기록이 너무 많아 공판이 몇 번이나 연기됐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일경은 사건이 마무리된 후 자체 보고서를 통해 경북지역의 유림을 배일 불령의 원천으로 규정했다. 항일 독립운동에 경북의 유림들이 앞장섰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망명 독립운동가 심산은 두 번의 유림단 사건에서 화를 입지 않았지만 고초를 당하는 동지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민족의 혼을 일깨우자

심산이 상해로 돌아오자 석오 이동녕, 백범 김구, 김두봉, 유자명, 정세호 등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심산은 석오와 백범에게 그가 보고 온 국내의 정세를 설명했다. "인심이 이미 죽었으니 비상수단을 써서 진작시키지 않으면 해외에 있는 사람들도 장차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 가져온 자금으로는 독립기지 건설 사업을 착수하기 어렵다. 청년결사대에 자금을 주어 무기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가서 왜정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부호를 박멸하여 국민의 의기를 고취시켜 보자. 그런 연후에 다시 국내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자." 심산의 말에 백범과 석오도 찬성했다. 백범은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자신과 친한 결사대원인 나석주 이승춘 등이 지금 천진에 있고, 의열단원도 그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니 먼저 무기를 구입해 천진으로 가서 이들과 만나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당장 유자명을 불러 계획을 설명하고 무기 구입 자금을 전달했다. 유자명은 의열단에서의 영향력이 컸다. 심산보다는 열다섯 살 아래인 유자명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조선인민을 학살 탄압하는 상황에서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 행동'이라며 투쟁노선을 정당화 한 인물이다. 백범의 소개 편지를 들고 심산은 천진으로 나석주를 찾아갔다. 심산은 나석주와 이승춘 등에게 말했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가 그대들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며 잠자고 있는 민족혼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오." 민족혼을 일깨워 달라는 심산의 뜻에 나석주는 "우리들은 진작 한번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어찌 즐겨 가지 않겠느냐"면서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심산은 나석주에게 무기와 자금을 건넸다. "제군의 용감함은 독립사에 빛나게 될 것이니 힘써 달라. 지금 횃불을 올리지 않으면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영원히 깨우지 못한다"는 격려와 부탁의 말을 전했다. 나석주 일행은 즉시 위해위로 떠났다. 바닷길로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석주는 근 6개월을 위해위에서 머물렀다. 배편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심산도 위해위로 가서 나석주와 수십 일을 같이 기거했다. 간신히 인천행 배편을 구한 나석주는 산동성 출신의 중국인 마중덕으로 변신, 일제의 학정에 신음하는 고국으로 향했다.

◆나석주 의거

도착 이튿날 나석주는 일제의 대표적 착취 기관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두 곳을 차례로 찾아갔다. 먼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이었다.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갔다. 제지하는 회사 직원 등을 사살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불발이었다. 동양척식회사와 맞붙은 조선철도회사를 거쳐 을지로 쪽으로 달아나는 도중에 추격하는 일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총소리에 몸을 숨기는 사람들을 향해 나석주가 외쳤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말라." 나석주는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총을 쏘고 쓰러졌다. 나석주 의거는 보름 이상 보도가 통제됐다. 일본 본토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대서특필됐지만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질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보도통제가 해제된 이후 발행된 동아일보 호외는 일제 당국의 제지로 배포가 금지돼 동아일보는 호외를 재발행하기도 했었다.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반 년 만에 일어난 나석주 의거는 심산과 백범의 예상처럼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반민족 친일부호들에게는 경종이 됐다. 그러나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갈구하는 2천만 동포들에게는 희망을 안겨 준 쾌거였다. 나석주는 숨을 거두기 전 일경의 심문에 "나는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나석주 의거는 결코 그 혼자 한 일이 아니었다. 독립을 희망하는 2천만 동포와 함께한 민족의 의거였다. 심산은 자서전에서 "3'1운동 이래 결사대로 순국한 이가 많았지만 나 군처럼 한 사람은 없었다"고 나석주 열사의 장렬한 죽음을 기렸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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