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여론조사의 함정

입력 2013-09-21 08:47:44

1995년 예일대 심리학과 존 바그 교수는 특이한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에게 마구 섞인 단어 묶음을 주고 문장을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A그룹은 '근심하는' '회색의' '주름진' 등 노인과 관련된 단어를, B그룹에는 '깨끗한' '개인적인' '목마른' 등 특별한 연상을 일으키지 않는 단어들을 각각 받았다. 실험의 목적은 문장을 만드는 능력의 측정이 아니라 '문장 만들기' 게임 후 피실험자들의 행동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A그룹은 B그룹보다 이동시간이 평균 15% 더 걸렸다. 결론은? 학생들이 노인을 연상시키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아 '노인처럼' 걸었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프라이밍 효과'(priming effect, 점화 효과)라고 하는데 먼저 받은 정보가 후에 얻은 정보를 처리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 다른 연구자들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프랑스 음악이 나올 때 프랑스 와인이, 독일 음악이 나올 때는 독일 와인이 더 많이 팔렸다.(1997년) 건강음료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설문지 작성용으로 녹색 펜을 주면 게토레이를 선택(게토레이는 연두색이다)하는 확률이 높았다.(2003년) 미세한 정보 조작으로 인간의 행동과 판단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수법은 여론조사에서도 잘 활용된다. 지난 18일 자 한겨레 신문의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조선일보의 혼외아들 의혹 보도에 대해 응답자의 68.9%가 "고위공직자의 공적 업무와는 상관이 없는 사생활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관계 확인 없이 함부로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반면 "고위 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 보도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24.6%에 그쳤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68.9% 쪽의 답변 문구에는 '사실 관계 확인 없이' '함부로' 등 그야말로 사실 확인이 필요한 단어가 들어 있다. 조사 대상자의 판단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프라이밍 기법이다. 조선일보를 편들 생각은 없지만 조선일보 기사가 "사실 관계 확인 없이 함부로 보도"한 것인지는 DNA검사가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다. 여론조사의 질문과 답변이 쳐놓은 함정을 피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독자들은 더한층 똑똑해져야 할 것 같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