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인물] 일제탄압 저항 속 농민문학 선구자 된 심훈

입력 2013-09-16 07:18:32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본명(대섭)보다 필명(훈)이 더 유명한 심훈(1901~1936)은 3남 1녀의 막내였다. 1915년 교동보통학교 졸업 뒤 독립운동가 이범석, 공산주의자 박헌영 등 수재가 다니던 경성고보에 들어갔다. 3·1만세운동(1919년)때 앞장섰다 잡혀 그해 11월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으로 석방됐지만 8개월쯤 옥고를 치른 뒤였다. 어머니를 위로하는 옥중편지는 그때 썼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무장투쟁론의 신채호 이회영 등 독립운동가를 만나 독립 의지를 불태웠고, 항주 지강대학을 다니다 1923년 귀국, 잠시 언론생활을 했다. 1926년 순종 붕어(崩御) 땐 '통곡 속에서'란 그의 시는 6·10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1932년 항일 저항문학의 최고 금자탑인 시 '그날이 오면'을 지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고향(당진)에서 1935년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로 농민문학의 길을 열었고, 단행본 출판일로 서울생활 중 장티푸스로 1936년 오늘 요절(36세)했다.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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