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날씨가 선선해졌다. 대낮에 그늘 없는 한길을 걸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무덥지는 않고, 저녁이면 제법 서늘하다 싶은 날도 있다. 문을 열어둔 채 꿈나라로 날아갔던 어떤 새벽은 찬 기운에 놀라 깨기도 한다.
이제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실감 나게 느껴진다. 줄기차게 우리 집 식탁에 머물고 있는 단호박은 물론이고, 끝물이 아닌가 여겨지는 수박과 참외 등은 이미 '흘러간 유행가'가 되었다. 붉게 익은 사과와 차돌처럼 단단하게 보이는 알밤이 기다려지는 철이 된 것이다. 하기야 한가위가 불과 보름 앞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실 봄에 봉숭아, 코스모스, 수세미 씨앗을 심으면서 소박하지만 큰 기대를 했다. 올여름과 가을에는 눈요기를 할 게 풍성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봉숭아는 폭염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여러 포기 잘 자라더니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다. 가끔 물을 주기도 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길을 지나던 아주머니가 분홍빛 꽃을 따가는 걸 보며 심은 보람을 만끽하기도 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코스모스는 싹도 못 보았다. 종묘상이 죽은 씨앗을 팔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도 그늘 때문인 듯하다. 주변에 뿌리를 둔 개나리들이 점점 자라나더니 이윽고 일대에 그늘을 드리웠고, 봉숭아도 한때는 무성하다 싶을 만큼 풍성한 잎을 뽐냈다. 자연스레 반 평쯤 되는 꽃밭의 땅은 그늘 천지가 되었고, 햇볕을 받지 못한 코스모스 싹은 간신히 태어나기는 했지만 내 눈에 띄기도 전에 죽어버렸을 성싶다.
그런가 하면, 수세미는 이웃의 나무와 담장을 타고 오르면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세를 보여주었다. 수세미의 줄기와 잎사귀에 뒤덮여 남천은 정체불명의 관목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사람 키 두 배 정도의 느티나무까지도 세상에 없는 희귀 식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당연히 나는 수세미가 많이 달리면 그것으로 설거지를 하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그런데 수세미에는 열매는 물론이고 꽃도 맺히지 않았다. 나는 수세미 수확은커녕 꽃구경도 못했다. 꽃이 없으면 열매가 생기지 않는 것이야 자연의 섭리이므로, 처음에는 다른 걸 심었나 엉뚱한 의심도 했다. 초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싹이 제대로 돋지 않은 코스모스, 느닷없이 죽어버린 봉숭아, 꽃이 피지 않는 수세미 덩굴을 지켜보는 일은 올해 여름과 초가을이 내게 안겨준 아픔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밀려온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놀이터에 뛰어노는 소리가 요란하다. 선선해진 덕분일 게다. 퐁퐁 하늘로 솟아오르는 아이들의 음성은 마치 봉숭아꽃, 코스모스꽃, 멋진 수세미 열매처럼 싱싱하고 아름답게 들려온다. 나는 문득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좋은 꽃밭이 되어야 할 텐데, 하고 소망한다.
정연지(대구미술광장 입주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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