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40년대, 수녀님들은 의사이자 어머니였다
가톨릭 수녀회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부터 해방 전까지의 초기 의료사업은 현재 북한지역에서 주로 이뤄졌다. 당시 남한지역 무료진료소는 2곳뿐이었는데 비해 북한지역에는 9곳이 있었다. 특히 대구파티마병원을 세운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이하 베네딕도 수녀회)의 경우 북한지역에서 약방과 시약소, 의원을 운영하며 활발한 의료사업을 펼쳤다.
◆원산약방을 운영한 헤르메티스 수녀
1925년 11월 21일 베네딕도 수녀회가 조선에 처음 파견한 수녀 4명이 원산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마틸데 히르쉬,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다이엘라 키르츠비클러, 헤르메티스 그로흐 수녀였다. 의료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간호사였던 헤르메티스 수녀는 그야말로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과도 같았다.
첫 파견수녀들이 원산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한 어머니가 산돼지의 습격을 받은 아이를 데려와 치료를 부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헤르메티스 수녀는 통역을 통해 사고 상황을 알아낸 뒤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근처에 사는 많은 어머니들이 아기를 등에 업고 치료를 받기 위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환자의 상태를 보고 병을 진단해서 치료했다. 독일인 수녀들은 한국인 자원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죽어가는 환자에게 대세(가톨릭 신자가 아닌 임종 직전의 비신자에게 베푸는 조건 세례)를 주었다.
아울러 시약소를 차리고 병자들은 찾아다니면서 치료했다. 1927년 4월부터 무료시약소 자리를 따로 마련해 치료에 나섰다.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로 약을 나눠주는 동시에 치료도 겸한 무료 진료소였다.
1927년 4월 30일 시약소를 원산약방이라고 이름지었다. 대중적 방법으로 어린이들의 질환 치료가 효과를 보면서 헤르메티스 수녀는 약초를 찾아 병을 치료했다. 덕분에 헤르메티스 수녀는 원산에서 명의로 알려졌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하던 중 폐결핵이 악화돼 1927년 7월 요양차 필리핀으로 떠났고, 이듬해 1월 12일 별세했다.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와 프룩투오사 수녀
이후 시약소는 1926년 10월 30일 입국한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가 혼자 맡아 운영했다.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일손이 부족해졌고, 1928년 6월 21일 입국한 오트마라 암만 수녀가 돕게 됐다. 1929년 4월 시약소는 양조장으로 이용하던 다섯 칸 정도의 집을 사서 넓힐 수 있었다. 이때부터 시약소는 '마리아의 도움'으로 불렸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서 약 조제에 대한 공부를 했다. 이때문에 한국에서도 약초를 찾아 뜯어다가 약으로 만들어 치료에 사용했다. 사람들은 프룩투오사 수녀가 조제한 약을 '수녀의 약'이라고 부르며 믿었다고 한다.
방광염'관절염'피부병'신장염으로 소변을 볼 수 없거나 각혈을 멈추게 할 때 속새풀을 끓인 증기를 마시도록 처방했다. 외상에는 쑥을 알코올에 담갔다가 건져내어 만든 약을 썼고, 역청과 유황을 섞어 만든 일명 '역청 고약'도 사용했다.
피를 깨끗이 하는데는 민들레 생즙을, 감기나 기관지염에는 질경이를 복용토록 했다. 소화가 안 될 때나 대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카밀레꽃 끓인 물을 마시게 하고, 피부병이나 상처의 독을 뺄 때는 카밀레꽃 끓인 물에 목욕하도록 처방했다.
1938년 6월 시약소가 새로 지어졌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한국에서 쓰이는 정식 의사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 지은 시약소는 독일인 의사 디오메데스 메펠트 수녀의 이름으로 허가를 받아 운영했다. 시약소라기보다는 무료 진료소였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중환자의 가족이 진료를 청했을 때는 언제나 기꺼이 왕진에 응했고, 기도 중에도 위급한 환자가 생기면 달려갔다고 한다. 자신이 치료할 수 없는 중환자들을 다른 병원에 보내려고 해도 환자들은 한사코 수녀에게 치료받기를 원했다.
이후 프룩투오사 수녀는 훗날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1952년 9월 16일 옥사독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순교자처럼 세상을 떠났다.
1928년 통계를 보면 일년간 시약소에서 치료받은 환자는 4천700명, 1930년에는 5천400명에 이르렀다. 병원 건물도 없고 의료기기도 갖추지 못한 무료진료소에서 프룩투오사 수녀는 홀로 이 많은 환자를 진료했던 것이다.
◆함흥 성심의원과 디오메데스 수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수녀원은 1941년 8월 22일 함흥에 성심의원을 세웠다. 성심의원은 현 대구파티마병원을 있게 한 산실이 된다. 함흥 성심의원 가운데 굴뚝이 높이 솟아 '굴뚝이 있는 집'으로 불렸다.
성심의원장인 디오메데스 수녀는 하루 60~80명의 환자들은 진료했고, 수시로 왕진도 갔다. 성심의원 앞에는 새벽 4시부터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아침 미사 후 의원에 나가면 거의 밤 12시 무렵까지 진료를 한 뒤 수녀원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늘이 낸 의술을 가진 독일 의사'라고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의사 수녀의 소문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기다리던 환자들은 잠긴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물통을 뜯어내기도 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기도와 식사하러 갈 시간이 없었고, 잠 자러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환자들이 몰려왔다. 업무가 새벽 2, 3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곧잘 벌어졌다. 너무 피곤해 수저를 든 채 식탁에서 잠든 적도 허다했다고 한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디오메데스 수녀는 급기야 1944년 2월 10일 심한 고열로 자리에 눕게 됐다. 폐렴 진단을 받은 수녀는 3개월간 요양한 뒤 계속 쉬라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한 채 다시 가난한 환자들의 진료에 나섰다.
성심의원이 생길 당시만 해도 독일에서 약을 원조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의약품 수송이 곤란해지자 약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인 수녀들은물론 서양인 수녀들에게도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3개월마다 거주신청을 갱신하고 신사참배도 강요했다. 일제 치하의 어려움은 해방 후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계속됐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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