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③독립운동의 터전을 닦으며

입력 2013-08-31 07:56:47

손문 주선으로 국민당 요인과 만남…한국 독립후원회 결성

◆손문과의 면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심산은 손진형, 손영직과 함께 중산저로 손문을 찾아갔다. 손문과의 면담은 중국 중의원 의원 능월이 주선해 줬다. 중산저는 검소했다. 손문은 한국의 3'1운동과 한국의 상황을 물어왔다. 심산 일행의 설명을 듣고 난 손문은 한국의 참혹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일본의 만행에 분개했다. 손문은 '나라를 잃고 10년이 채 안 돼 이처럼 큰 혁명운동이 일어난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들어보지 못한 일'이라며 3'1운동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이 망하면 중국 또한 병들고 한국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 역시 독립을 보장받을 수 없다며 한중 양국이 서로 협조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도 했다. 중국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은 한국의 혁명을 도와야 한다는 말도 했다. 손문은 심산에게 참'중 양원이 개회 중인 광주로 가서 국민당 요인들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먼저 연락을 해두겠다는 손문의 자상한 배려에 심산은 감읍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조국 광복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생겨났다. 심산에게 시급한 일은 중국 요인들과의 관계 모색이었다. 상해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해 중국 각지에 나와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도울 수 있는 기반을 닦는 일이 급선무였다. 파리행을 그만두고 상해에 있으라는 주변 독립운동가들의 권고도 그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문의 격려와 제안은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것이었다. 손문을 만나게 해 준 능월은 이문치의 소개로 심산을 찾아왔었다. 이문치는 상해에 가면 꼭 만나서 도움을 얻으라며 거창의 거유 곽종석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독립후원회 결성

8월 무더위와 함께 찾아온 콜레라에 반년을 같이 먹고 같이 자던 손진형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심산은 능월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이문치와 광동공교회 회장인 임복성 등이 마중을 나왔다. 곧이어 국민당 요인들과 만났다. 군정부 외교부 차장 오산이 총장 서겸을 대신하여 심산을 찾아왔다. 참의원 의장 임삼, 중의원 의장 오경렴, 군정부 총재 오정방, 참모총장 이열균을 비롯해 여러 의원들과 조폐창장 교육회장 광동성 성장 등도 만났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에 호의적이었고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한중 양국의 동병상련에 너도나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인사들의 호의적인 자세에는 무엇보다 손문의 막후 지시가 큰 힘이 됐다.

이문치와 오산, 능월은 심산에게 한국 독립후원회를 결성키로 했다고 전했다. 참'중 양원에서 발의하고 군'정'교'상 각계에서 호응키로 했다고 했다. 300여 명이 모인 독립후원회 결성식 날 심산은 한중 양국이 공동의 적 일본과 싸워야 하는 대의를 역설했다. 후원회 회원들은 정부를 대신해 개인적으로 의연금을 모금, 한국 임시정부로 송금해 주기로 약속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 이처럼 기쁜 날이 또 없었다.

능월 등은 또 상해에 와 있는 한국 학생 중 일부를 광주로 데려와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치자고 제의했다. 중국어와 영어 실력이 향상되면 광주의 각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시키자고 했다. 경비는 국민당 동지들이 대기로 했다. 젊은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쳐 독립의 역군으로 키워내자는 제안을 받은 심산은 한국의 독립이 그다지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중국 동지의 배신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세는 심산과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중국의 정정이 혼미했다. 청조를 타도하고 세운 중화민국은 아직 확고한 기초를 다지지 못한 채 내분과 외란이 그치지 않았다. 적잖은 의원들이 내란을 피해 광주를 떠났다. 대부분 심산과 한국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다. 설상가상으로 후원금 관리를 맡았던 이문치가 후원금과 함께 사라졌다. 당장 학생들의 숙식 비용이 난감한 문제였다. 고립무원의 신세가 됐다. 결국 상해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후원금을 들고 사라진 이문치와 그의 사위 이흔은 심산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심산의 입을 막아 후원금의 존재 자체를 감추려고 한 그들은 심산이 가르치던 학생 몇몇을 매수했다. 심산은 자신을 노린다는 것보다 후원금이 협잡배의 손에서 녹아내리고 만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떨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할 때 후원금은 그냥 놓쳐 버리고 말 돈이 아니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의 사정은 이전과 달랐다. 심산 자신의 신변조차 장담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문치는 홍콩으로 달아났다고도 했다. 돈을 되찾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독립에의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심산의 가슴에 믿고 의지하던 동지가 못질을 한 것이다.

상해로 돌아온 심산은 박은식이 살고 있는 동네에 거처를 잡았다. 심산보다 20년 위인 박은식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사장과 주필을 거치면서 민족 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인 이였다. 후일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대통령에 피선됐다. 그가 쓴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은 한국의 근세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심산은 재력이 든든한 임복성을 설득해 박은식과 함께 사민일보라는 신문을 만들어 편술원이 됐다. 매일 3만 부를 찍어 2천여 부를 국내로 우송했다. 동지의 배신에 깨져버린 꿈을 접고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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