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환 교수의 세상보기] 전두환과 노무현

입력 2013-08-31 07:57:19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위의 증언대에 서서 원고를 읽었다. "광주사건은 폭도들에 대한 불가피한 자위권 행사"라고 하는 순간 회의실은 난장판이 되고 회의는 중단되었다. 그가 회의장을 떠나려 할 즈음 盧武鉉(노무현)이라 적힌 명패 하나가 날아들었다. 이른바 명패 투척사건이다. 보수세력에 대한 민주'진보세력의 응징처럼 비쳐졌다.

노무현은 5공 청문회 스타가 됐고,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것도 잠시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의원, 국회의장에게 명패와 구두를 집어던지는 의원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순간이다. 보수 세력의 민주'진보세력에 대한 대역습이었다. 그 후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났고, 열린우리당은 민주'진보세력으로는 사상 최초로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두 사건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보수세력과 민주'진보세력의 관계를 상징한다. 사건의 주인공 전두환과 노무현은 각각 보수와 민주'진보세력의 아이콘으로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각각 보수 진영과 민주'진보 진영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된다. 대통령 재직 중일 때 상대 진영은 한 사람은 '놈현'으로, 또 한 사람은 전두한(剪頭漢, 머리를 자르는 자)으로 불렀다. 그 후에도 보수 진영은 끊임없이 노무현을 민주'진보 진영을 향한 공격의 제물로 삼았고, 민주'진보 진영 역시 전두환을 독재와 부패의 화신으로 공격했다.

지금도 두 사람은 여전히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다. 전두환은 추징금 문제로 가족 전체가 수사 대상이며, 노무현은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NLL 정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한 사람은 이승에 살면서 계속 추달을 당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저승에서 불려 나와 끊임없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수사를 받고 난 후, "삶과 죽음은 하나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과 결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추달과 모욕을 당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인 것 같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차이만큼 다른 점이 많지만 닮은 점도 있다. 다 같이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독선적이라 할 만큼 뚜렷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 따르는 사람도 많다. 전두환은 지금도 외출 때는, "도덕적 불안을 충성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증거"(에릭펠턴)라도 보이듯 한 무리의 '가신' 집단을 대동한다. 열광적인 종교 집단과 같이 비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노사모는 '친노'라는 이름으로 정치권에서 지금도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차이점은 더 많다. 전두환은 독재, 부패, 지역주의, 권위주의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반면에 노무현은 탈권위주의, 민주화, 탈지역주의, 소수자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한 사람은 한국정치를 퇴행으로 내몰았고, 또 한 사람은 기득권, 주류세력에 저항하며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한 몸부림을 계속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서거로 끝날 줄 알았던 1970년대의 유신독재체제를 1980년대로 연장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은 영호남의 지역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3저(원유'달러'이율의 동반 하락)현상에 힘입은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보수세력의 기득권을 한층 강화시켰다. 이에 대항하듯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서 전두환의 독재체제에 맞섰고, 노동자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서는 등 1990년대의 민주화에 일조했다.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부산 출신 정치가로서 전라도에서 더욱 사랑받았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의 인물론이 아니다. 한국의 정치는 왜 두 전직 대통령이 만든 과거의 덫에 갇혀 있는가를 말하고 싶다. 전두환의 추징금에 대한 수사도 그때 해결 가능했던 것을 뒤로 미룬 탓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왜 국정원 개혁이라는 미래지향적으로 끌어가지 못하는가. 이석기의 내란음모 사건이 한국 정치를 공안정국이라는 과거의 덫에 가두는 퇴행으로 흘러서도 안 된다.

계명대 교수·국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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