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35>느린 걸음으로 만나는 성주 옛 풍경

입력 2013-08-21 07:12:10

곳곳 유림 문향서린 고택·시비…성밖숲엔 민초들 삶의 흔적들

①토담이 정겨운 한개마을 거리 풍경. 새마을 운동의 열풍 속에서도 옛 가옥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냈다. ②TV드라마 촬영장으로도 활용된 한주종택 한주정사. ③흙벽을 80cm 이상 두껍게 쌓아 여름에도 시원한 온도가 유지되는 하회댁 고방.
①토담이 정겨운 한개마을 거리 풍경. 새마을 운동의 열풍 속에서도 옛 가옥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냈다. ②TV드라마 촬영장으로도 활용된 한주종택 한주정사. ③흙벽을 80cm 이상 두껍게 쌓아 여름에도 시원한 온도가 유지되는 하회댁 고방.
①전통시대 마을 축제였던 \\
①전통시대 마을 축제였던 \\'희초\\'가 열렸던 성밖숲 ②일제시대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는 배리댁 ③성주향교의 대성전. 이곳에는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④임란 의병 제말, 제홍록 장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쌍충사적비 ⑤통일신라 양식이 잘 나타나있는 동방사지 7층 석탑.

오전 8시 50분 성주군 용암면에서 성주읍내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성주시외버스정류장까지는 25분이 걸린다. 한적한 마을 앞에 몇 차례 멈춰선 버스는 구불구불 재를 넘었다. 낙동강 지류인 이천을 끼고 너르게 펼쳐진 성주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주=참외'라는 등식이 자연스레 입에 붙지만 사실 성주 곳곳에는 유림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꼼꼼하게 둘러보면 의외로 숨은 이야기들도 많다.

◆조선시대 유물을 따라 걷는 성주읍내

성주읍을 둘러보기로 했다. 읍내 곳곳에는 조선시대 유적들이 숨은그림처럼 감춰져 있다. 시외버스정류장에서 700m가량 이천 쪽으로 걸어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성밖숲이다. 천연기념물 제403호로 지정된 성밖숲은 읍성 밖에 조림된 숲으로 300~500년생 왕버드나무 57그루가 자라고 있다. 숲 속에 조성된 잔디밭에는 주민들이 게이트볼을 하고 있었다. 나무 그늘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는 주민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식혔다.

성밖숲에서 이천을 따라 내려오다가 성주여고 방향으로 500여m가량 따라가면 쌍충사적비가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싸우다 성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제말 장군과 진주성 싸움을 돕기 위해 출전하다가 전사한 조카 제홍록의 업적을 기려 정조 16년(1792년)에 새긴 비석이다. 성주군청 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면 성산관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성주목의 관아 객사로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겪으며 전소돼 수차례 새로 지었다.

군청삼거리에서 청사도서관 쪽으로 100여m 걸었다. 다세대주택과 느티나무 사잇길로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성주 이씨 봉산재와 시조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로 시작되는 '오로시'의 작자 이직이 바로 성주 이씨다.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출정했던 이여송의 글을 새긴 시비도 있다. 이여송은 성주 이씨 가문이다.

김창집을 기리는 충헌각을 지나 도로를 건너 예산1리 마을회관 앞에 오면 2층 한옥인 만산댁과 배리댁이 있다. 1938년 지은 이 집은 건물의 바닥과 창호에서 일본의 흔적이 짙게 남아있다. 설계 시점부터 2층으로 계획한 점이 특징이다. 한옥 형태의 2층 가옥으로는 경북에서 유일하다. 함께 서 있는 배리댁도 겉보기에는 전통 한옥처럼 보이지만 일본식 가옥의 평면구조와 창호, 실내장식 등을 갖추고 있다. 보수 공사 중인데 문을 열어둔 곳이 없다. 네거리를 지나 마을 쪽으로 1㎞가량 더 내려오면 성주향교다. 숨이 차게 언덕을 올라 명륜당 앞에 서면 너른 성주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입구로 나와 들어온 길의 반대쪽으로 400여m를 걸으면 도로 건너편 잔디밭 한가운데 동방사지 7층 석탑이 탁 나타난다. 신라 시대인 8세기 말에 건립됐는데 1~3층 옥계석에 연꽃무늬가 조각된 점이 특징이다. 도로를 따라 1㎞를 오면 성주전통시장이다. 뜨거운 햇살의 등쌀에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희초가 열리던 옛 성밖숲

매달 끝자리 2, 7일은 성주전통시장이 열린다. 장이 열리는 도로 중간쯤에는 주창수(73) 씨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이 있다. 그가 지금 자리에서 물건을 판 지도 벌써 40년째다. 성주시장의 터줏대감인 셈이다. "예전 성주장은 근방에서 제일 큰 장이었어요. 우시장 규모도 대단했죠. 하루에 소 수백여 마리가 거래됐고 서울에서도 소를 사러 왔을 정도니까."

당시 성주군 인구는 12만 명이었다. 4만5천여 명인 지금보다 3배나 더 많았다. 우시장을 둘러싼 밥집이 17군데에 이르렀고 이곳에서는 술잔이 돌았고, 소 판 돈을 노리는 야바위꾼들도 들끓었다. 소를 팔면 전대에 돈을 넣고 허리에 단단히 맨 뒤 그 위에 점퍼를 입어 가렸다.

매년 봄이 되면 성밖숲에서 '희초'가 열렸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고기도 삶고 밥도 해먹으며 노는 거죠. 50~60명은 먹고 놀 정도로 큰 잔치였어요. 연령대별로 모여서 막걸리가 찰랑거리는 나무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눠 먹었어요." 희초는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관광버스가 생기고 형편이 나아지니까 멀리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나간 탓이었다. "1980년대만 해도 하루에 70만~100만원을 벌었어요. 굉장한 수입이었지…. 그 덕분에 자녀 넷을 키웠고. 지금은 하루에 20만원도 못 팔아요. 학창 시절 가게에 오던 손님이 와서는 '아이고, 아저씨 아직까지 장사하십니까?'라고 놀라는 일도 많아요. 하하." 북적이던 시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참외 농사가 잘되면서 쇠락했다. "음식이나 가정용품, 각종 물건들을 싣고 다니는 행상들이 마을마다 다니며 물건을 팔았어요. 사람들도 굳이 시장까지 오지 않고 행상한테 물건을 샀지. 그게 편하니까."

◆한개마을은 문을 열어 둔다

시외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오전 11시 50분 월항면 한개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성산 이씨 집성촌인 한개마을로 가는 버스는 하루 두 차례가 전부다. 경주 양동마을처럼 마을 앞에서 뒤쪽으로 차차 올라가는 지형인데 규모는 훨씬 작다. 560여 년 전인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개척했는데 지금까지 9명의 대과 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나왔다. 특히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와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5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교리댁과 응와종택, 한주종택, 월곡댁, 진사댁, 도동댁, 하회댁, 극와고택, 첨경재 등 지정문화재 가옥이 9채가 있고 75가구를 복원 중이다. 마을 전체는 24촌 이내의 일족이 모여 산다. 양반과 하인으로 구분되지 않고 집안 사람들만 모여 산 점도 특징이다. 이 때문에 빈부격차가 생기면 같은 집안이라도 갈등 구조가 형성되곤 했다.

한개마을은 새마을운동이 없던 곳이었다. 그 덕분에 옛 가옥들과 담장이 전통 방식 그대로 남았다. 마을 원래 토담은 황토를 쓰지 않는다. 마을에서 구하기 쉬운 흙을 그대로 사용했다. 새로 쌓은 담이 황토를 사용한 점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한개마을이 생긴 건 단 한 사람의 선택 덕분이었습니다. 12대 할아버지인 월봉 이전현이 스물여섯 살에 요절을 했는데, 할머니가 개가하지 않고 4명의 아들을 키웠어요. 아들들은 모두 마을에 살며 자손을 낳았고요. 그 덕분에 마을이 유지가 된 거죠. 1960년대 이농이 심할 때는 수박이나 참외 같은 특용작물을 키우면서 수입을 올렸어요. 형편이 넉넉하다 보니 새마을운동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죠."

한개마을은 집집마다 문을 열어두고 산다. 하회댁 안으로 들어섰다. 곡식 등을 보관하는 고방은 폭염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했다. 오랜 세월에 걸려 흙벽을 80㎝ 이상 두텁게 쌓은 덕분이다. 흙벽은 완전히 마르지 않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두껍게 쌓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고방에 있는 항아리마다 '술독' '보리쌀독'이라는 써둔 오래된 글씨들이 적혀 있다. 하회댁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의 생가이기도 하다. 한개마을 가옥들은 집집마다 큰 소나무가 자란다. 한주정사 앞마당에도 멋들어지게 굽은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원래 마을이 들어선 자리가 소나무 군락지인데 소나무를 그대로 살려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한주정사는 TV드라마 촬영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수빈 회장은 "마을이 보존과 활력의 균형이 맞았으면 좋겠다. 관광지로 변해 상업화되지 않고 사람 사는 마을이면 좋겠다"고 했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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