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힐링 영향 저녁 술자리 '뚝'…아침 먹으면서 강연·회의 바람
대구경북의 아침이 달라졌다. '조찬(朝餐) 열풍'이 불면서 활기가 넘치고 바빠졌다.
일부 CEO와 정'관계 인사로 한정됐던 조찬모임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동창모임, 스터디그룹, 협동조합 등 소모임들도 조찬열풍에 가세 중이다. 중'장년 남성들뿐 아니라 젊은 층과 여성층에도 확산되고 있다. 조찬. 사전적 의미는 '손님을 초대해 함께 먹는 아침식사'를 한다는 뜻. 그러나 '식사'보다는 아침 시간을 활용해 공부하고 사업아이디어를 내는 모임으로 진화 중이다.
◆굿모닝 대구!
이달 6일 오전 7시 30분, 대구 수성구의 한 음식점. 이른 아침인데도 실내에는 20여 명의 손님들이 북적였다. 식당 한켠에는 문화관광대구경북협동조합 이사들의 아침식사를 하며 회의를 진행했다. 이날의 주제는 대구경북 문화관광 활성화 방안. 팔공산 개발, 베트남 관광교류 방안 등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요즘 대구시내 음식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24시간 음식점을 비롯해 죽 집 등에서 유사한 형태의 조찬모임이 성황 중이다. 문화관광대구경북협동조합 양은지 이사는 "처음에는 저녁 시간에 회의를 했다. 그러나 술자리로 이어지다 보니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회의시간을 아침으로 옮기다 보니 담백한 의견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대구 남구의 기관단체장으로 구성된 대덕회도 아침 일찍 열린다. 겨울에는 오전 7시 30분, 여름에는 오전 7시에 모여 간단한 아침과 함께 관련 현안에 대해 머리를 맞댄다. 남구청은 아예 간부회의 시간을 오전 8시로 앞당겼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갖는 환경미화원, 민원인들과 갖는 조찬간담회는 지역에서 유명하다. 임병헌 남구청장은 "이른 아침부터 현장을 살펴봄으로써 주민들의 불편사항을 최대한 신속히 해결할 수 있고, 각종 회의 또한 아침에 개최함으로써 일과 시간에는 결재와 찾아오는 민원인을 만나는데 효과적이다"고 했다.
이렇게 조찬모임이 늘어나는 건 주5일 근무제로 인한 웰빙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대구경북연구원 오동욱 사회문화연구팀장은 "최근 지역에서도 웰빙'힐링 바람이 불면서 아침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저녁 술자리가 줄어든 대신 식당이나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강연을 듣거나 회의를 갖는 게 더 좋다는 이유에서다. 남보다 더 부지런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회풍토도 '조찬 열풍'을 거들고 있다"고 했다.
◆뿌리 깊은 조찬 문화
서울 등 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고 느긋하다는 평을 받아왔던 대구경북. 그러나 조찬문화의 전통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대구상공회의소가 운영 중인 '21세기 대구경제포럼'은 지역 조찬 모임의 원조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이 조찬 정례 세미나는 1995년 지방 최초로 시작됐다. 매월 둘째 수요일 오전 7시부터 대구를 대표하는 CEO들이 참여한다. 이후 부산 광주 대전 울산 등 전국 10여 개 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난달까지 총 179차례 세미나가 열렸다.
지역 정치권도 조찬 열풍의 진원지다. 지역 정치권에는 수많은 조찬모임이 있다. 자치단체와의 협의를 위한 모임부터 의원들끼리의 공부모임, 지역구 인사들과의 모임 등 조찬모임의 목적과 형태도 다양하다. 2010년 생긴 대구시의원들의 연구모임인 '동인포럼'은 대표적인 조찬모임으로 알려져 있다. 호텔 등지에서 대학교수나 자치단체장들의 강의를 들으며 아침을 열었다. 최근에는 경비절약 차원에서 시의회에서 포럼을 열기도 한다. 정순천 대구시의원은 "일주일에 조찬모임 1, 2개를 유지해야 잘나가는 의원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그러나 서울 등 수도권 조찬모임이 대구경북에 비해 규모나 역사에서 앞선다. 우리나라 조찬모임의 역사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첫 회의를 개최한 한국능률협회의 최고경영자조찬회. 2년 뒤 비영리단체로는 처음으로 인간개발연구원이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라는 조찬모임을 개설했다. 이후 두 단체는 지속적으로 월 단위, 혹은 주 단위로 조찬모임을 가지며 지식과 정보를 교류해 왔다. 잠시 멈칫하던 조찬모임들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지역 정치권의 한 인사는 "지역의 조찬모임은 아직 회의를 겸하거나 명사 초청 특강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서울의 경우 회원들이 오랜 기간 연구한 결과를 보고서로 만들어 브리핑하는 형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도 지역이 정치나 경제'경영 쪽에 집중되고 있는데 반해 서울은 인문학이나 문화예술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고 했다.
◆조찬의 진화
조찬문화가 몇 차례 부침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도 나타나고 있다. 정'관계 위주의 모임에서 소모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협동조합이나 연구모임 등 소모임 등도 조찬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대구사회를 연구하는 모임인 한가람회 박태현 회장은 "회원들의 직업이 다양하다 보니 모임 시간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아침으로 모임 시간을 잡은 후부터 회원들의 참여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콘텐츠도 변하고 있다. 주로 대학교수나 자치단체장들이 주요 강사로 나왔지만 최근에는 인문학 문화예술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모임의 주제 역시 정치'경제분야에서 문화'음식'레저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요즘 조찬모임엔 30, 40대 젊은 회사원이 눈에 띄는가 하면 여성 참가자 수도 제법 늘고 있다.
새로운 조찬모임도 속속 생겨났다. 중소기업인을 대상으로 한 조찬모임부터 산악회, 여행자들을 위한 조찬모임도 생겨나고 있다. 구미의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황정욱 씨는 "조찬모임이 각종 사업 아이디어를 얻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상상력 빈곤에 허덕이는 요즘 기업인들에게 조찬모임은 일종의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흐름을 타고 호텔이나 음식점들은 '아침 손님'을 위한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 대구의 한 대형음식점 직원은 "조찬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이들을 위한 맞춤형 음식 등을 개발하고 있다. 조찬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육개장이나 쇠고기 국밥 등을 선호하다가도 나중에는 부담스러워 한다. 그래서 조찬 손님들을 위해 죽이나 새로운 메뉴를 선보였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했다.
2040미래연구소 도건우 소장은 "대구는 훌륭한 조찬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버려 아쉽다. 지식 재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조찬모임은 앞으로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조찬이 끝난 후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소모임을 만들어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 우수 강사진을 다른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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