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의 인문학, 음악을 말하다] 뱃노래, 바르카롤 (Barcarole)

입력 2013-08-10 08:00:00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하늘 한가운데 불가마가 펄펄 끓고 있으니 온 도시가 숨 막히는 찜통이 될 수밖에. 이 찜통 속에서 푹푹 삶기는 기분, 한자 팽(烹)의 의미가 진하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전국의 바다와 계곡이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더위를 식히는 데는 물놀이 이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게으른 자들은 시원한 여름 과일을 챙겨 '방콕'하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끼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이 또한 그리 나쁘지 않은 피서법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사내아이들은 주로 장난감 자동차나 장난감 배를 가지고 놀았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남자들은 변함없이 자동차에 집착하고 돈을 좀 벌면 비싼 요트를 사서 바다 위에 띄워 과시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뱃노래는 원래 노동요에서 시작되었다. 사공이 노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였으며, 고기를 잡으며 닻을 감고, 그물을 올리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리듬을 타며 여럿이 함께 일하다 보면 일이 수월해지고 심지어 일을 즐기게 된다. 노동요에서 시작된 뱃노래는 점차 여흥을 위한 음악으로 바뀌어 갔다.

포레, 멘델스존, 차이코프스키, 쇼팽, 호프만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뱃노래를 작곡했다. 이들의 뱃노래는 주로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곤돌라와 그 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연들을 노래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이탈리아를 동경했다. 이탈리아는 일조량이 부족한 북구인들에게 남국이자 태양의 나라였으며 로마제국이 이룩한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술과 오페라의 나라였다. 베네치아는 당대 예술가들에게 최고의 휴양지였다. 이들은 물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에서 특별한 영감을 얻었으며 베네치아를 매개로 수많은 걸작을 쏟아냈다.

뱃노래는 그것이 포레의 것이든 멘델스존의 것이든 바다에 떠 있는 곤돌라의 흔들림을 전해 준다. 그래서 편안하게 들린다.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면 페달과 왼손의 저음이 물의 깊이와 물의 빛깔, 음영을 그려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오른손은 왼손의 반주 위에서 뱃전을 스치는 물결과 물결 위로 반짝거리며 눈부시게 내려앉는 햇살을 그리고, 한 프레이즈의 선율처럼 멀리 사라지는 곤돌라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배는 여성성이다. 배에는 여자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곤돌라 사공들이 다 남자들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베네치아 곤돌라 사공들은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선택된 사람들이다. 아무튼 배의 흔들림은 요람의 흔들림과 비슷하다. 요람을 흔들어 주면 아기가 잠이 들듯 뱃노래를 들으면 요람에 누운 듯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물의 깊이를 나타내는 저음은 자궁 속 양수에 떠있을 때 들었던 엄마의 심장 박동소리와 흡사하다. 엄마의 숨소리는 밀려오는 파도소리와 같다. 태아가 양수 속을 유영하며 가장 포근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듯 관객은 뱃노래를 들으며 궁극의 평화를 느낀다.

그러나 연주에 귀 기울이다 보면 이곳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연들이 한결같이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은 일종의 기호학이며 해석학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술은 우회하는 것이고 숨기는 것이며 감추면서 보여주는 이중성을 지닌다. 오히려 감춤을 통해서 보다 광대한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아름다움은 복합적인 것이다. 뱃노래, 바르카롤은 여흥 이상의 탐미적인 측면이 강하다. 밀란 쿤데라는 음악이 무거운 것들을 공명시켜 삶의 표면 위에 떠오르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수로 위에 떠 있는 곤돌라들이 하나하나의 음표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베네치아라는 도시 자체가 물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곤돌라 같기도 하다.

쇼팽의 바르카롤을 반복해서 듣는다. 크리스티앙 짐머만의 연주가 햇빛 찬란한 베네치아의 바다로 나를 데려간다. 뱃노래는 유쾌한 유희이며 영원을 향한 동경이며 불멸의 욕망이다. 그래서 즐거우면서도 심각하다.

서영처 시인'영남대학교 교책객원교수 munji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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