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 글로벌 네트워크 꿈꾸는 '모자왕'
단돈 500달러를 갖고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해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남자가 있다. 미국 모자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CEO로 우뚝 섰으며, 유대인 상인과 중국인 상인에 버금가는 한상(韓商) 글로벌 네크워크 구축에 열정을 바치고 있는 사람. 조병태(67) 사단법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명예회장이자 SONETTE,Inc 회장을 미국 LA에서 만났다.
◆운동과 정치에 관심 많던 영덕 소년
조병태 회장은 1946년 경북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조영환)는 영덕군수였다. 5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바닷가에서 놀면서 옥수수'감자'닭서리를 하며 살던 영덕은 그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서린 곳이다. 6'25가 터지면서 그는 가족을 따라 대구로 피란을 왔다. 대구에 온 그의 아버지는 경북대병원과 경북대학교에서 사무국장을 지냈다. 조병태는 또래와 다른 소년이었다. 기계 체조와 핸드볼 운동을 한 그는 밤이 캄캄할 때까지 운동에 몰두했고 한편으로는 정치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매일신문 사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선거 벽보를 밤새도록 읽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28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을 때는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반독재 구호를 외쳤지요. 당시 대구는 격동의 현장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서는 체육교사 생활을 했다. 성수중·신용산중학교에서 핸드볼 팀을 만들어 감독으로 지냈다. 두 학교 모두 핸드볼에는 불모지였는데 그가 팀을 만들고 난 뒤 2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신용산중학교 핸드볼 감독을 맡았을 때 결승전에서 성수중학교와 만났는데, 양쪽 응원단 4천 명이 다 제자였다고 했다. 지도력을 인정받아 그는 핸드볼 한국여자국가대표팀 코치를 6개월간 맡았다.
"대표팀 코치를 계속 했다면 어떻게든 우리나라 스포츠계에 이름을 남겼겠지만, 더 큰 세상에 나가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미국이었어요."
마침 둘째 형님(조병우)이 유풍실업이라는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유풍실업에 입사해 6개월을 근무한 뒤 1975년 이 회사 뉴욕지사장 직함을 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체육교사를 하면서 모자를 많이 썼던 그는 미국에서 모자 사업을 하면 전망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갈 때 그가 지니고 간 돈은 500달러. 50달러짜리 월세방을 구한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달에 50달러 이상 쓰지 않겠다는 벼랑 끝 계획을 세웠다. 월세'생활비로 100달러를 쓰면서 다섯 달 안에 기반을 잡겠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미국의 모자왕으로 우뚝
그러나 미국에서의 비즈니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동차도 없이 3년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영어가 서툰 탓에 상대방이 오지 말라고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찾아가는 일도 있었다. 상대가 안 만나주면 화장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황당해하는 상대방에게 모자 샘플을 보여주며 5분만 시간을 달라고 매달렸다. 이런 식으로 하루 20~30곳의 바이어에게 접촉을 시도해 약속이 잡힌 5, 6명을 매일 만났다. 천신만고 끝에 큰 거래가 성사돼 가죽 제품을 미국에 들여왔는데 곰팡이가 피어 20만달러를 물어줘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평생 벌어서라도 꼭 갚겠다"며 거래 상대에게 담보로 영주권과 가족사진을 맡겼다.
"자살하려고 뉴욕 허드슨 강변에 갔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한 번 뛰어보자고.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 타임스퀘어 광장을 지나는데 화려한 네온사인 광고판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 모자에 광고를 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모자에 유명 제품 광고를 찍는 '프로모션용 캡' 아이템은 대박이 났다. 미국에 건너간 지 5년 만에 그는 완전히 일어섰다. 자수 모자를 내놓은 데 이어 1994년 그는 새 브랜드 '플랙스피트'(FLEXFIT)를 선보였다. 모자 둘레를 탄성 있는 밴드로 처리해 모자 뒤편의 트임과 클립 없이도 사이즈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제품이었다. 플랙스피트는 시장에 고급 브랜드로 선풍을 불러일으켰고, 유대인들이 장악했던 미국 모자 시장의 판도마저 바꿔놓았다.
2000년 그는 자신의 회사 이름을 THOMAS C.PROMOTION, Inc에서 SONETTE, Inc로 바꿨다. 연 매출액 1억8천만달러이며 연간 3천500만 개의 모자를 생산하는 그의 회사는 현재 미국 모자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글로벌 한상 네트워크 구축은 나의 꿈
사업에 성공했지만 그는 '배가 고팠다'. 한때 미국 정치에 입문하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웬만한 스피치 구사력으로는 정치가로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 앞에서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한인 2세를 정치가로 키우고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를 이루는 데는 한인들의 경제 네크워크 구축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스라엘 뒤에는 유대인 상인들이 버티고 있고 전 세계엔 5천만 중국 화상(華商)이 있습니다. 특히나 중국 경제 성장의 배경에는 화상들이 있습니다. 유대인 상인, 화상에 버금가는 한상 네트워크를 키워 한인들의 정치'경제적 위상을 높이고 고국에도 이바지하게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는 올해로 17년째 한상 네트워크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1996년 제9대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구상했고 이해 뉴욕에서 첫 대회를 열었다. 세계한인경제인대회와는 별도로 세계한상대회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세계한상대회의 위상이 어떤지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가 대회장을 맡아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11차 세계한상대회 때 일이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대선 유력주자 3명이 같은 날 아침, 점심, 저녁때 대회장을 찾아 그와 면담하거나 식사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한인들이 외국에 진출, 성공해 집 사고 땅 사면 곧 우리나라 영토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요청합니다. 한국은 좁고 세계는 넓습니다. 나오세요. 그리고 성공하십시오. 열정과 도전 정신만 있다면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미국 LA에서 글'사진 김해용기자 kimhy@msnet.co.kr
◇조병태 회장 프로필
1946년 11월 10일: 경북 영덕에서 태어남
대구초교·경북사대부설중고교·경희대 졸업
1969~74: 성수중·신용산중학교 교사
1975년: 유풍실업 뉴욕지사장
1976년: THOMAS C.PROMOTION, Inc 설립
1981~88년: 세계핸드볼연맹 국제심판
1991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회장
1995년: 밝은사회 국제클럽 뉴욕지회장(UN산하 기구)
1996년: 제9대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장
2000년: SONETTE, Inc로 회사명 변경
2012년: 제11차 세계한상대회 대회장
1999년 무역의 날 대통령 표창'2011년 무역의 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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