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시비성이 싫어 흐르는 물로 막다

입력 2013-07-30 07:07:31

'狂奔疊石吼重巒/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

최치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재능이 좋았고, 그의 고독이 좋았고, 그의 시가 좋았다.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치고 망해가는 신라의 재건을 위해 시무책을 올리기까지 했으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그의 삶이 좋았다. '배반된 이상국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내가 바라는 세상이 아님을 매일 한탄하고 살면서, 드러내지 않고 사라짐을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위안하던 때가 있었다. 시비(是非)하는 소리가 싫어 바위 사이를 울리며 흐르는 물로 차단해버리고 그 고독 속에 파묻힌 그의 결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다닌다. 내가 내뱉은 언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주울 수 있는 언어, 내가 버린 언어. 세상은 바야흐로 언어의 천국이다. 내가 내뱉은 언어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듣는 언어로 인해 내가 아프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하면 모든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 언어가 시(是)하는 것이든, 비(非)하는 것이든 그 모두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지난 시간과는 달리 내 속에 들어온 시비성(是非聲)은 아주 자유롭게 내 속을 흘러다닌다. 흐르는 물소리로 시비성을 막아버린다고 시비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시(是)'가 반드시 '시(是)'인 것도 아니고, '비(非)'가 반드시 '비(非)'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是)'가 '비(非)'로 변하기도 하고, '비(非)'가 '시(是)'로 바뀌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비'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결정해버린다면 삶은 미궁으로 빠진다. 삶은 끊임없는 '시비'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치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비'를 결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이다. 개인을 넘어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덕이고 법일 것이다. 우리가 도덕이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도덕이나 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시대정신을 그 속에 담기 때문이다. 작년에 대구고에서 4개 고교 연합으로 이루어진 '사회철학 토론 어울마당'에서 바로 그 지점을 다루었다. 키워드는 '법과 자유와 정의'였다. 고교생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판단하는 수준보다는 훨씬 높았다. 그들의 생각은 다양했고, 논리적이었고, 깊었다. 어른이 판단할 때 용납할 수 없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들이 어른이 될 때쯤에는 그러한 생각이 일반화되어 도덕과 법으로 정착될지도 모른다.

올해 대구상원고는 학생들의 학교생활규정을 어울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강당에 모든 학생들이 모여 원탁토론을 통해 스스로 규정을 마련했다. 일부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합리적으로 자신들이 지켜야 할 의무를 생각했고, 그 의무를 규정으로 결정했다. 스스로 결정한 사항이기에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시비성'이 들린다고 흐르는 물소리로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교육의 풍경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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