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너무 고생 아빠가 정말 미안해"
22일 오후 대구 동구 신암동 파티마병원의 한 병실. 환자와 간병인이 같이 있는 다른 병상과 달리 지승우(48'대구 수성구 지산동) 씨는 홀로 병상에 앉아 있었다. 지 씨의 부인은 공장에 일하러 갔고,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 지 씨를 보러 오지 못한다.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다. 지 씨는 "항암 치료가 8차까지 이어지니 가족들에게 간병받기도 미안하다"며 "이제는 가족들에게 '입원, 퇴원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 굳이 나올 필요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쉬어 본 적 없는 삶
지 씨는 어릴 때부터 일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중학교 입학하면서 제 학비는 제가 벌었어요. 신문 배달로 돈을 벌었는데 잘한다는 칭찬이 듣고 싶어 열심히 일했죠. 그 덕분에 중학교 학비도 댈 수 있었고요. 그때부터 버릇처럼 열심히 일했어요. 지금까지 일을 쉬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후 지 씨의 삶은 일의 연속이었다. 지 씨는 20년 넘게 도장 공사와 인테리어 일을 해 왔다. 하지만 매번 단가 후려치기를 당하며 원가보다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따는 일이 잦았다. 또한 일을 맡긴 쪽에서 계약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게다가 건설 경기까지 어려워지며 일감도 점점 줄어들어 갔다. 일을 해도 지 씨 손에 들어오는 건 빚뿐이었다.
하지만 지 씨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고, 무엇보다 2, 3년 전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한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입시를 앞둔 딸의 학자금을 벌어놓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지 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 고물상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 달에 150만원은 겨우 벌 수 있었다. 부인은 2년 전부터 자동차 부품공장 일용직으로 취직해 일하고 있다. 부부가 일해서 번 돈으로는 빚을 갚기에도 빠듯했지만 그래도 일부는 저축해 나중을 대비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악성림프종'이라는 불청객
지 씨가 고물상에서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근처 이비인후과를 통해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큰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 측은 "아무래도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후 찾아간 파티마병원은 CT, MRI 촬영을 통해 '악성림프종'이라는 최종 진단을 내렸다.
"'악성림프종' 진단을 들은 게 작년 3월이었어요. 저도 가족도 믿어지지 않았죠. 그저 머리가 멍해졌을 뿐이었어요. 게다가 이 병이 치료가 오래 걸리는 병이라고 하니 '아직 돈을 더 벌어서 가족들 호강시켜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답답해져 왔습니다."
지난해 5월 지 씨는 오른쪽 귀 뒤에 있는 림프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 및 8차에 걸친 항암 치료를 이어오고 있다. 1년이 넘는 긴 투병 기간 동안 지 씨에게는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이명 증세뿐 아니라 돌발성 난청, 백내장까지 찾아왔다. 또 수술 후 음식물이 자꾸 기도로 넘어가면서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아예 위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연결해 음식물을 섭취하고 있다.
"점점 손가락의 뼈가 녹으면서 손가락이 짧아지는 병까지 생겼어요. '레이너드 병'이라고 하던데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늘 어지럽고 머리가 멍해요. 1년을 앓아보니 이 병은 사람을 천천히 말려 죽이는 것 같아요."
설상가상 지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아버지의 치매기는 더 심해졌다. 가스불 끄는 걸 잊어 집에 불을 낼 뻔한 일도 있었다. 돌볼 가족이 아무도 없었기에 결국 지 씨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다행히 보건소를 통해 믿을만한 요양원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지 씨는 장남으로서 아버지를 직접 모시지 못해 너무 죄송스러워했다.
◆병원비'생활비'빚의 삼중고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의 학자금도 문제다. 가계곤란 장학금으로 한 학기 500만원의 장학금 중 절반을 지원받았지만, 나머지는 지 씨 가족의 몫으로 남았다. 결국 치료비로 쓰려고 저축해 둔 돈 일부를 딸의 학자금으로 내야만 했다. 방학을 맞은 지금, 딸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자신의 생활비와 학자금을 벌고 있다.
"사실, 딸에게 기대를 많이 했어요. 적어도 지방 국립대를 갈 만한 성적이었는데, 제가 아프면서 딸이 심적으로 많이 흔들렸나 봐요. 그래서 지난해 수능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이 나왔고 결국에는 지금 다니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제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딸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아 미안할 따름입니다."
지 씨의 병원 치료비는 항암제 값과 입원비를 합쳐 한 달에 20만원 안팎이다. 또 아버지의 요양병원 비용도 그 정도 든다. 지 씨 부부는 차상위계층으로, 지 씨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돼 어느 정도의 의료비를 보조받고, 부인이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매달 80만~90만원 정도를 벌지만 치료비와 요양비를 대기에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도 내년에는 입시를 치러야 하고, 딸도 학업을 계속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모아둔 돈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빚은 아직도 지 씨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
지 씨는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병원 생활이 갑갑하고 힘들다. 집안의 가장이고 장남인 지 씨는 아픈 몸 때문에 가족 안에서 자기가 해야 할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차라리 제대로 한 번 시원하게 돈을 벌어놓고 죽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적어도 내 자식들 결혼하는 것은 보고 죽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전까지 내가 가장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저 세상에 갈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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